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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www.seoprise.com에 연재된 쩜억개의 12편의 한국의 명문가문 시리즈.

분류없음
2008/02/12 18:13
 
2005년 9월 서프라이즈www.seoprise.com에 연재된 쩜억개의 12편의 한국의 명문가문 시리즈.

070602 18:30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uid=6&table=honor&issue1=&issue2=&field_gubun=&level_gubun=&mode=&field=&s_que=&start=&month_intval=

 

한국의 명문가문 (제 1 편) - 이후락家


번호 626362   글쓴이 쩜억개    조회 17904   누리 5 (5/0)   등록일 2005-9-22 17:06


대한민국에 수많은 명문가문 가운데 왜 하필 맨 첫번째로 후라이 이후락의 집을 들먹이는가?

대머리 까진 놈도 있고, 귀 늘어진 놈들도 있는데 왜 하필 이후락이냐?


그 이유는 길이길이 남아야 할 이후락의 업적이 역사 속에 묻혀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후락은 수많은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를 못 받고 있다.


대머리 까진 놈은 그래도 국회에 출석하기도 하고, 절에 좀 가 있기도 했다. 귀 늘어진 놈은 추징금이나 많이 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민중들이 대머리 까진 놈하고 귀 늘어진 놈은 때려죽이라고 난리다.


그런데 여기에 반해 박정희정권을 사실상 세우고 지탱해 온 부정축재자 이후락에 대해서는 조용하다. 내가 친구들을 붙잡고 무작정 물었다. "혹시 이후락을 아느뇨??" 


역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설령 이름 석자는 어디서 들어봤더라도 구체적으로 이후락이 어떤 인물이며, 그 인물이 어떤 업적을 통해서 오늘날 자신의 가문을 한국의 명문가문 반열에 올려놓고 지금도 대한민국 주류로서 떵떵거리고 사는 건지 잘 모르고 있었다.


울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울산시민들이 선정하기도 하는 등 아주 가관이다. 


우선 이후락이라는 사람은 박정희 밑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호가호위했다. 


대통령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사람으로써 대한민국에 "떡값"이라는 말이 처음 회자되게 만든 사람이다.


"떡을 들고 다니다 보니 떡고물이 묻었다..."


이 천인공노할 말을 스스럼없이 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이 받아쳐드신 떡고물이 무려 194억원이다. 70년대 초에 194억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아보기 위해 당시 서울에 그래도 사람이 살 만한 집 한칸을 마련하신 나의 모친에게 물었다.


"당시 얼마 주고 집을 사셨나요?"


"200만원."


요즘 서울의 웬만한 집값이 2-3억 간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후락은 떡고물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조원에 가까울 만큼 쳐 잡수신 것이다. 이것은 대머리와 귀 큰 놈의 수준에 거의 근접하는 것이다.


당시 김종필, 이후락을 비롯해 전두환 신군부에게 박정희정권 하 부정축재자로 몰린 사람들이 해먹은 돈이 밝혀진 것만 총 887억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치면 10조원이다.


이후락 이분은 얼마나 낯짝이 두꺼우신 분인가?  우리는 이런 배짱을 배워야 한다. 혼자서 2조원을 쳐 잡수시고도 떡고물이라고 말하는 저 배짱...


다들 알다시피 이후락은 박정희 시절 공무원이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할 공직자가 떡고물을 직무 중에 2조원씩이나 쳐 잡수신 것이 과연 자랑할만한 명예인가?


그것이 대가성있는 뇌물이든, 어떤 덜떨어진 놈들이 그냥 갖다 쳐 바친 것이든 이후락같은 공무원 10명만 있으면 대한민국은 거덜난다. 또 상식적으로 어떤 미친놈이 대가없이 이익을 수수하게 해 주겠는가도 한번 생각을 해 봐야 한다.


그 이익과 대가성을 명확하게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수사 기법상의 어려움일 뿐 공무원 이후락에 대한 민중들의 도덕적 평가는 그와는 별개다.


미국 의회의 보고서에도 이후락은 스위스에 비밀정치자금을 예치하고 관리하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락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가 스위스에 예치한 비밀자금이 60억달러. 당시 수출 100억 달러 달성 어쩌구 떠든 것과 비교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후락이 관리한 박정희의 스위스계좌는 박근혜로 명의가 바뀌었다고 한다. 전두환이 10, 26 이후 박근혜를 스위스로 보내 돈을 찾아와서 민정당 창당 자금으로 썼다는 설도 있다. 그 때 따라갔던 보안요원이 수고비로 5만달러를 받았다고 고백한 바도 있다.


이후락
▲ 이후락
ⓒ엠파스 이미지 검색
어쨌든 이후락이 검은돈을 얼마나 많이 받아먹었는지 이후락의 부인과 자식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쳤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집에 돈 봉투를 들고 오는 사람이 하도 많다 보니 집주인이 내방객으로부터 받은 봉투를 소파 밑에 밀어 넣어 두었다가 깜빡 잊어 버려 청소하던 식모가 당시 돈 수백, 수천만원짜리 수표가 든 돈 봉투를 주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코흘리개이던 이후락의 셋째 아들 이동욱이 모씨의 집에 놀러왔다가 모씨의 어린 딸에게 돈 세는 법을 가르쳐 준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폐를 한 장씩 넘기면서)"돈은 1억, 2억, 3억... 이렇게 세는 거야"


박정희가 뒈지고 나서 전두환이 껍죽거리면서 조사 좀 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유야무야 다 처리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종결지어졌다. 큰 깡패들이 나타나면 동네 양아치들이 숨을 좀 죽이고 사는 그 정도였을 뿐이다.


공무원이 2조원이나 처먹은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단죄도 없이 그 불법적인 이익을 그대로 인정한 채 대중의 망각을 틈 타서 도리어 그 막강한 금력과 배경으로 명문가문 행세까지 하게 됐다.


그 엄청난 돈으로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초월읍 도평리, 기가 막힌 명당터에 대저택을 지어놓고 왕처럼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 아닌가?  별장과 그 부지가 무려 9000평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해수욕장에도 붉은 지붕과 크림색 외관, 1층의 고급스러운 테라스와 2층의 이국적인 인테리어를 갖춘 무지하게 예쁜 별장을 지어놓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되느냐 이 말이다.


김재규의 옥중수양록에 보면 이렇게 나온다.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엇으로 시정할 것인가. 지금도 천하를 활보하고 있는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정렴, 오정건, 장동운, 길재호 등 수많은 부정치부자의 재산을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슨 방법으로 환수하겠는가.


지금 참여정부의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김승규 국가정보원장이 이후락의 1000분의 1이라도 뇌물을 먹었다면 과연 조중동은 가만히 있겠는가?


왜 이후락이 뇌물 처 잡수신 건 용서가 되고, 이병완실장이나 김승규원장은 안되는 거지? 조중동이 그 이후라도 이후락의 비리나 부정에 대해 무섭게 질타하고 심층취재한 적 있나?


천문학적인 돈만 받아먹은 게 아니라 한승헌 사법개혁위원장에 의하면 "김대중 납치사건"도 이후락의 작품이라고 한다. 야당의 대통령후보이자 정치지도자인 김대중 씨를 일본 동경에서 백주대낮에 납치하여 국내로 끌고오는 황당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것이다.


김대중납치사건은 박정희에 대한 이후락의 과도한 충성이 빚은 참극이었다. 물론 박정희의 암묵적인 동조 내지는 방관이 있었겠지.


그 뿐이 아니다. 71년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패배하고 김대중 후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박정희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이후락에게 졌다." 당시 이후락은 관권, 금권선거의 총 책임자였다.


이런 짓거리까지 하고도 그 패거리들이 뚫린 입이라고 민주주의 운운하는 거 보면 기가 차다.


최종길 교수 의문사에 대한 진상조사가 활발하지만, 나는 불만이다. 당시 이후락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고방식을 가진 부도덕한 인간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어디 최종길 교수 뿐이겠는가?


최종길 교수는 서울 법대 교수이고, 그 가족들도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으니 이나마 진상규명의 노력이 있는 것이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그 정점에 박정희가 있고, 그 밑에 HR이라고 불리던 이후락이 있는 거 아닌가?


그 끔찍한 국가적 폭력 "실미도 사건"의 책임도 이후락에게 있다. 경향신문을 강탈한 것도 이후락이다.


평생을 남 뒤나 캐고, 약점이나 잡아서 공작하고, 대한민국을 우간다같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국가의 녹을 먹는 민주공화국의 공직자가 국민은 어떻게 보든지 말든지 박정희 눈에만 들면 된다는 식으로 온갖 아부를 하였다.


이후락은 교활한 인물로 매우 유명하다. 그의 교활한 삶을 자세히 보면 기가 차다.


김정렬은 이런 말을 했다.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에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 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말이요. 해방 직후 귀국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은 모두 군사영어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를 수료하면 일본군 시절의 계급을 참작해서 국군 장교로 임관시켰거든. 그런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 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 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겠지"


박준규는 이후락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5.16 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자가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나가더구먼."


물론 박정희라는 사악한 인물이 부하들을 그렇게 만들어 이용한 측면이 많다. 또 사람을 써먹고는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식으로 용도폐기하는 것도 물론 박정희의 특기다. 어떻게 보면 이후락은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정을 해 주기에는 죄악이 너무 크다. 또 이후락은 미국 CIA가 박정희 주변에 심어놓은 첩자라는 얘기가 있다. 게다가 이후락은 박정희의 반민주적 행각을 앞장서서 도와준 악질 앞잡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민중의 인권을 짓밟았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욕하면 중앙정보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다가 죽여버리기도 하고, 각종 죄목을 붙여서 간첩으로 만들기도 하는 그런 민주주의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노동조합 만들려고 하는 사람을 잡아다가 가두어 버리는 그런 민주주의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국가정보기관이 정치인들을 시도 때도 없이 도청하고,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그런 민주주의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지성인이라는 대학교수나 대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담은 글 한 줄 발표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체제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긴급조치로 처벌할 수 있게 하고, 긴급조치를 위반한 사례를 허락없이 발표하거나 신문에 보도하면 다시 긴급조치 위반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체제였다.


이것이 박정희가 제시한 국가비전이었고, 이후락은 이 국가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충직한 개노릇을 마다하지 않은 자였던 것이다. 물론 개노릇을 하면서도 한눈을 팔면서 열심히 떡고물을 주워먹었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좋다. 개노릇도 좋고 떡고물 주워먹었던 것도 좋다. 그러나 이 대명천지에 뻔뻔스럽게 한국의 명문가문 행세를 하는 꼴만은 제발 보고 싶지가 않다.


이후락과 형님 동생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 등이 소위 말하는 이후락 5인방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화그룹의 창업자 일명 "다이너마이트 김" 김종희다. SK 창업자 최종건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이들은 모두 이후락과 사돈을 맺게 됐다.


이후락에게는 세 아들이 있다.


큰 아들 이동익은 박정희의 고교동창이자 당시 끗발 좀 날리던 호남정유 사장 서정귀의 딸과 결혼했다.


작은 아들 이동훈은 한화 창업자 김종희의 딸 김영혜와 결혼했다. 그러니까 현 한화회장 김승연과 처남 매부지간이다.


막내 아들 이동욱은 SK그룹 창업자 최종건의 딸 최예원과 결혼했다.


이렇게 보니까 무지하게 그럴싸하지 않은가?


박정희치하의 최대 이권이 무엇이었는가?  미국 석유회사 칼텍스와 유니언 오닐사의 한국 내 합작선 선정이 가장 큰 이권이었다.


결국 이 엄청난 이권은 이후락 큰 아들의 처갓집인 호남정유와 이후락 둘째 아들의 처갓집인 한화그룹 계열사 경인에너지가 먹었다. 게다가 막내아들의 처갓집인 SK는 유공을 먹었으니...  헐


요즘 종이신문들이 이후락에게 치매기가 있다는 둥 말년이 불행하다는 둥 하면서 연막작전을 펴고 있다.


좆을 까라, 씹쌔들아...  이후락이는 젊을 때부터 바둑을 많이 두고, 비상한 두뇌를 지닌 인물이라서 내가 보기엔 절대 치매 안 걸린다. 이제 겨우 여든인데 벌써 엄살은... 요즘 교통사고만 안나면 90세까지는 다 살 수 있다. 그리고 젊을 때부터 그렇게 잘 쳐먹고 살았는데 뭘 죽는 시늉을 하나?


그 죄값을 다 치루고 가야지, 그냥 편안하게 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후락에게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


이후락의 사돈인 SK그룹 창업자 최종건과 조선일보 방일영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물론 이후락도 방일영과 깊은 관계였다. 방일영만??  동아일보 김상만과도 깊은 관계였다. "형님의 형님은 형님이다"라는 공식이 있지 않은가?


설마 그런 깊은 관계를 가진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 이후락 아직도 잘 먹고 잘 사니까 얼른 조지라는 칼럼을 쓰지는 못할 거 아닌가?


이후락 둘째 아들의 처남이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인데 굶어죽게 내버려두기야 하겠는가?


게다가 이후락 둘째 아들의 처남 김승연의 장인어른이 얼마 전까지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있던 5선 의원 서정화다. 지금도 한나라당 고문으로 있다. 서정화가 중정 차장 출신이니 이후락을 모를 리 없다. 이후락에 대한 진상조사라도 하겠다고 하면 아마 쌍심지를 켜고 덤벼들 것이다. 게다가 이후락의 사돈인 서정귀가 서정화의 6촌형이다. 게다가 김승연의 동생 김호연을 통해서 대한민국 모든 재벌이 또 다 얽히게 된다.


또 이후락 아들의 처남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의 큰아버지 김종철이 국회의원을 여섯 번이나 해먹은 사람이다. 김승연의 작은 아버지 김종식도 국회의원이었다.


내가 요즘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서정화를 왜 이렇게 특별대우하는가를 의심스러워서 알아봤더니 얼마전에 죽은 윤덕주가 숙명학원 이사로서 자랑스런 숙명인상을 비롯해서 숙명학원에서는 거의 영웅으로 취급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숙명학원 발전기금도 심심하면 내고, 한국 농구계에서도 알아주는 인물이었다.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이다.


윤덕주는 이후락의 사돈 서정귀의 마누라다. 껄껄...  신문쪼가리들, 윤덕주가 박정희의 절친한 동창 서정귀의 마누라이며 그 덕분에 끗발 좀 날렸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농구계의 대모이며 숙명의 큰 별이 떨어졌대나 뭐래나..... 헐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대한농구협회 회장이 열린우리당 이종걸 의원이라는 사실이다. 이후락의 사부인 윤덕주가 죽었을 때 조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실눈을 뜨고 계속 지켜볼 것이다.


어쨌든 또 이후락의 막내며느리 최예원의 사촌 오빠가 SK 최태원 회장이다. 사촌 올케가 바로 그 악명 높은 노태우의 딸 노소영이다.


이 노소영의 동생 노재헌의 부인이, 그러니까 노태우의 며느리가 신동방그룹 신명수회장의 딸 신정화다. 신명수는 노태우의 비자금을 관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신정화의 이모가 송원자다. 이 송원자의 남편 이봉서, 그러니까 노태우 며느리 신정화의 이모부 이봉서가 요즘 이회창 정계복귀를 위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으로 우리 민주개혁세력은 보고 있다.


이봉서는 이회창의 경기고등학교 후배다. 그 주변에는 아남그룹 회장 김주진과 한국유리공업 회장 이세훈 등이 있다.


이 이봉서의 딸 이원영이 이회창의 군대 안간 큰 아들 이정연과 결혼을 했다. 이로써 이봉서와 이회창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후락의 영향력이 건재하다는 증거가 된다. 이후락 -  전두환 - 노태우 - 이회창은 한 통속이라는 강력한 증거다.


노태우의 며느리 신정화 쪽으로 가다보면 전두환이 또 나온다. 신정화의 아버지 신명수의 동생 신영수의 아들, 그러니까  신정화의 작은 아버지의 아들이 이희상 한국제분 회장의 딸 이유경과 결혼을 했다.


이유경의 형부가 전재만이다. 재만이 아버지가 바로 전두환이다.


전두환 아들 전재만의 마누라 이윤혜의 동생 76년생 이미경의 시어머니가 송광자다. 송광자의 조카가 이원영이다. 이원영의 시아버지가 이회창이다.


이회창의 구기동 자택이 전두환의 며느리 이윤혜의 명의로 되어있던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렇듯 이후락가는 여전히 막강하게 대한민국 명문가문 행세를 하며 여전히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노태우, 명문가문, 서프라이즈, 이회창, 이후락, 전두환, 피투성이




한국의 명문가문 (제 2 편) - 홍진기家



 

언제건 어디서건 명문가문은 있었다. 그걸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명문가문은 과거에 위세나 부리고 행세나 하던 세도가와는 구분이 되어야 한다. 그 위치도 존귀(?)한 것이어야 하지만 고결한 자격 또한 갖추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공동체를 위해 사리사욕을 마다하고 헌신 하지 않고는 현대적 의미의 명문가문이 결코 될 수 없다. 하물며 이 공동체의 파괴를 도모했던 자들이, 알알이 구성원으로 박혀있는 집안이 명문가문 운운하며 떵떵거리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다.

우리같이 미천한 백성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백성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건과 배경을 갖추지 않은 채 그저 가지고 있는 금력과 권력이나 앞세워 명문가문으로 둔갑한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 홍진기 가문이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불행하게도 홍진기는 지식인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는커녕 일제 식민지하에서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로 재직하였다.

△ 홍진기
ⓒ 엠파스 검색

홍진기의 약력을 보면 1945년 9월에 미군정청 법제부 법제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8월 15일에 해방이 됐는데 불과 한 달도 안돼서 민중에게 돌팔매를 맞기도 전에 친미 꼭두각시로 변신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런 행적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우리 헌법에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는 부분이다.

내가 생각할 때 전두환이 5.18 때 광주에서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나 4.19 때 이승만이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이나 다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 죄질에 있어서 조금의 차이도 없다고 생각한다.

홍진기는 4.19 혁명 당시에 내무부장관직을 수행했고, 그 직전에는 법무부장관으로서 이승만에게 강력하게 계엄령을 건의했던 인물로서 이 당시에 홍진기가 지휘하는 경찰에 의해 서울에서만 무려 100여명의 양민들이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광주학살의 발포책임자를 규명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대머리까진 새끼가 광주 피바다를 일으킨 것이라는 점을 심정적으로 잘 알고 있지만 그 명령체계, 지휘계통의 진상을 명백하게 아직까지 밝히지는 못하고 있고 현재 진행 중이다.

광주학살 때 대머리가 한 짓과 마찬가지로 이 홍진기는 4.19 혁명 당시 양민에게 발포명령을 한 혐의로 사형선고까지 받은 인물이다. 물론 최종책임자는 이승만이겠지만 적어도 광주학살과 비교한다면 "정호용"쯤 되는 인물이다.

3.15 부정선거로 민중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법무부장관으로 있던 홍진기를 이승만이 내무부장관으로 발탁한 것만 봐도 그 성향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홍진기가 직접 발포명령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지휘계통에 있던 사람이었고, 그 책임을 지고 곧바로 특사로 풀려 나긴 했지만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며, 적어도 그런 역사적 모순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발포 명령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승만정권에 부역하면서 반민주적 행태를 일삼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홍진기의 마산시위 관련 망언은 유명하다. 경남 마산에서 발포사건이 일어나 여론이 들끓자 다음과 같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마산시위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 '광주사태는 빨갱이들의 짓'이라는 대머리의 주장과 매우 닮아있다.

△ 4.19민주혁명 ⓒ 엠파스검색

여론이 양민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에 대해 들끓고 일어나자 당시 정권의 실세라는 자의 입에서는 이런 끔찍한 말도 나왔다. "총은 쏘라고 만든 것이다."

이기붕이 부통령 사퇴를 결심하고 성명서를 작성했으나 홍진기는 장경근, 한희석 등 몰지각한 자들과 함께 머리를 굴려 "사퇴를 고려한다."라는 문구로 바꾸기도 했다. 정권연장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이 홍진기의 머리에서 나온 "고려"라는 한마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 죽고 다쳤는지....

이런 죄를 홍진기는 쏙 빠지고 모조리 곽영주와 정치깡패들에게 뒤집어씌운 것 아닌가?

게다가 홍진기는 법무부장관으로 재직하는 중에 경향신문을 전격폐간한 전력도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국가보안법 파동... 그런 홍진기가 중앙일보를 창간해서 언론자유를 말하다니 가소롭지 않은가? 조봉암 사건도 그 즈음에 일이다.

어쨌든 대한민국 썩은 언론의 침묵의 카르텔이 오늘의 홍진기를 만든 것이지, 제대로 된 언로가 열려 있는 사회였더라면 오늘의 홍진기는 존재할 수가 없었고, 그 홍진기의 자손들이 지금처럼 대한민국 주류로 행세하며 살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이쯤되면 왜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말하는지 모두들 이해가 갈 것이다. 30만명의 엄청난 군중이 부정선거와 부패정치에 신물이 나서 거리에 모여 시위를 하는데 거기다 대고 무차별 사격을 가할 것을 명령한 사람이 여전히 대한민국 명문입네 하고 떵떵거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우울한 풍경인가?

광장을 피로 물들인 사람이 광장의 주인이다.

광장을 피로 물들인 홍진기는 약 5년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당대 최고의 사업가 이병철과 결탁하게 된다. 그 사이에는 훗날 국무총리를 지낸 신현확이 있었다. 홍진기가 감옥에 있을 때 이병철은 신현확을 통해 옥바라지를 지극 정성으로 하며 홍진기와 손을 잡기 위해 애를 썼다고 한다.

△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개관식에서 점등하고 있는 이건희 삼성회장과 홍라희 리움관장 ⓒ 2004 삼성

고급관료 + 재벌의 결탁을 통하여 "언론권력"을 창출하기 위해 머리를 쓴 것이라 보여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중앙일보가 삼성의 사보로써 곡필을 일삼았던 궤적은 너무 진부하여 반복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이병철의 호암자전을 보면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언론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병철은 언론의 힘이 정치의 힘보다 강하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어쨌든 홍진기의 큰 딸 홍라희와 이병철의 세째 아들 이건희가 결혼함으로써 고급관료 + 재벌의 결탁은 더욱 굳건한 반석 위에 올라간다.

이런 배경 속에 만들어진 언론사 중앙일보에 대해 어떤 일말의 양식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홍진기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은 그의 장남 홍석현을 신직수의 딸 신연균과 결혼시킨 대목이다. 이 신직수라는 인물은 나중에 자세히 더 살펴볼 가치가 있다.

간단히 말한다면 신직수는 불과 36살의 나이에 검찰총장을 꿰찬 사람이다. 그 이유는 박정희가 5사단장으로 있을 때 법무참모였기 때문이다. 홍진기보다 나이가 10살이나 어리다. 같이 놀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진기는 신직수를 사돈으로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박정희정권의 실세이기 때문에... 부실한 자신의 박정희정권 인맥을 탄탄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신직수는 육사+법조인 즉 육법당의 초대 당수격의 인물이다. 민복기와 더불어 대한민국 검찰의 자존심을 망가뜨린 인물이다.

검찰총장을 무려 7년 6개월 동안 재임했다. 중앙정보부장도 무려 3년 동안 역임했다. 법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박근혜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정수장학회의 전신이었던 부일장학회의 포기각서를 받아낸 인물도 바로 신직수다. 10만 147평의 땅과 막대한 주식을 빼앗아 박정희의 손아귀에 안겨준 것이다.

△ 신직수
ⓒ 네이버 검색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는데 앞장섰던 것이 중앙정보부임이 밝혀지면서 당시 중정부장 신직수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박정희가 죽기 직전에 대통령 법률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끔찍한 유신헌법을 구상한 인물로도 손꼽힌다.

이 신직수가 바로 홍진기의 장남 홍석현의 장인이다. 중앙일보가 언론자유를 부르짖으며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색한 일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신직수에 대해서도 한국의 언론은 대체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침묵의 카르텔이 또 작동하는 것이다.

신직수의 두 아들은 사업가라고 한다. 글쎄.. 동강기업, 광륜상사?? 이런 회사도 있나? 이거 혹시 유령회사 아닌가? 내가 아무리 찾아봐도 번듯한 사업을 하는 신창균, 신황균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경영인명록까지 뒤져봐도 없다. 뭐지?? 혹시... 갑자기 패션 70s가 떠오른다. 껄껄.. 그럴지도 모르지.

신직수는 이동원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이동원은 박정희 하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자다. 굴욕적인 한일협정 당시 외무부장관이었다. 그 때 수석대표가 정몽새의 장인 김동조다.

이동원의 저서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통령을 그리며.." 헐..

이 사람이 요새는 학원사업에 나섰다. 동원학원이라는 건데.. 문어발식으로 무섭게 확대되어 나간다. 그 확대를 진두지휘하는 것은 그의 딸 이정은이다. 44살의 나이에 학장이 되었다. 이정은의 남편은 한일투자신탁 사장 이정진이다.

이동원은 한진그룹 조중건과 사돈을 맺었다. 조중건의 딸이 이동원 집에 들어왔다. 따라서 홍진기가문과 한진그룹이 전혀 상관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홍진기의 사돈 신직수의 손자들이 노는 것도 한번 쭈욱 살펴보았다. 거의 미국물을 먹기 위해 준비 중이거나 미국물을 먹고 있다. 이 아이들이 이제 미국물을 먹고 돌아와서 자랑스런 주류로서 민중들을 또 가르치려 들 것 아니겠나?

여기까지의 홍진기 가문 혼맥은 빙산의 일각이다.

홍진기는 장녀 홍라희를 통해서 대한민국 최대재벌 삼성의 엄청난 인맥을 장악했고, 장남 홍석현을 통해서 박정희정권의 인맥과 손을 맞잡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재 삼성리움미술관 부관장인 막내딸 홍라영을 통해서 전두환정권의 실세였던 노신영과 사돈을 맺은 점이다.

△ 노신영 ⓒ 네이버 검색

노신영은 전두환정권 초기 외무부장관을 지내다가 3년간 안기부장을 지내고 또 2년간 국무총리를 지낸 자다. 노태우와 더불어 전두환 후계자로 물망에 오르던 5공의 실세다. 장세동만 돌팔매를 받고, 노신영은 멀쩡한 거 보면 신통하다. 마치 곽영주만 뒤집어쓰고 홍진기는 멀쩡한 것과 꼭 닮았다.

노신영 또한 홍진기 못지 않게 화려한 혼맥을 자랑한다. 앞으로 노신영 가문도 명문가문(?)으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 노신영과 홍진기는 손을 잡는다.

노신영은 5공 실세인 것은 물론 노무현대통령과 국회에서 만나 혼이 났던 유찬우와 사돈이다. 또 현대그룹 정세영회장과도 사돈이다.

또 홍진기는 둘째 아들 홍석조를 양기식의 딸과 결혼하게 한다. 양기식은 철도청장, 서울시장을 지낸 양택식의 동생으로서 이 양씨집안도 상당한 혼맥을 자랑한다. 양택식의 큰 아들 양원용은 태광그룹 창업자 이임룡의 사위다. 양택식의 딸 양정아는 전두환에게 사랑을 받던 한일그룹 김한수회장의 며느리다. 이 김한수와 노태우의 처남, 그러니까 노태우의 마누라 김옥숙의 오빠인 김복동과 사돈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기가 찰 것이다. 김복동의 딸 김미경이 김한수의 며느리다.

홍진기가 설립한 중앙일보는 아들 홍석현으로 이어졌다. 홍석현의 누나가 삼성그룹 이건희회장과 결혼했다. 이건희회장과 홍석현의 누나 사이에 이서현을 낳았다. 이서현은 김재열과 결혼했다. 이 김재열의 아버지가 동아일보 명예회장 김병관이다.

홍진기의 외손자가 이제 대한민국 최대재벌의 후계자가 되게 생겼다.

그러니까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이승만 치하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양민에게 발포를 명령했던 사람이 살아나서 일단 대한민국 1등 재벌과 사돈을 맺고, 그 힘을 바탕으로 이승만정권 이후에 박정희가 등장하여 권력에서 멀어질까 염려되니까 당시 실세인 신직수와 사돈을 맺고, 또 양기식과 사돈을 맺고, 그후 신군부가 출현하니까 노신영과 사돈을 맺고.....

그 자손들은 그 힘을 계승하여 더욱 강력한 힘을 재생산하고 또 다시 당대 최고의 권력을 찾아 혼맥을 맺고 또 그 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선조들의 죄악을 은폐하고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이런 자들이 명문가문 어쩌구 하면서 대한민국 주류로 행세할 때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명무실화되는 것이다.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이건 완전히 사문화되는 것이다.

불멸의 홍진기를 보면 전두환이 왜 나만 갖고 그러냐고 항변하는 것도 전혀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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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가문 (제 3 편) - 김동조家


한국의 명문가문은 2005년 9월에 피투성이님이 서프라이즈에 연재한 12편의 대한민국 명문가문들에 대한 글이다.


하루가 정말 후딱 지나간다. 이 허접한 글을 쓰는 것도 시간을 꽤 잡아먹긴 하지만, 틈날 때마다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적 스승인 노무현대통령, 유시민의원의 하루에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주옥같은 말씀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그 진의를 곰곰이 따져보고, 가끔 날파리같은 알바들하고 댓글 투쟁도 하자면 바쁘다. 또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는 일과 가운데 미녀사진 열람이라는 독특한 취미가 있기 때문에 이거저거 하자면 꽤 바쁘다.

그러면서도 기쁜 것은 이런 글을 보고 서프앙들이 경악을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들은 다 상식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프앙들도 이런 사실을 정확히는 아닐지언정 누구나 대략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서프앙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수구떼들의 만수산 드렁칡 행각에 울화가 치미게 만드는 것이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무현대통령이 초선의원 시절 말씀하시길 "분노 때문에 정치를 시작했고, 지금도 식지 않아서 한다"고 하셨다. 이 말을 수구 떼들이 이상하게 비틀어 가난과 학력컴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몰아붙였지만, 나는 "잘못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문제의식"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거기서 상응하는 변혁의 에너지가 솟구쳐 나오는 거 아닌가?

이것을 마치 성격파탄자라도 되는 것처럼 몰아붙였는데, 노무현대통령의 분노의 정치는 요즘 단순히 여야가 비생산적으로 정쟁하는 식의 증오의 정치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본다.

이 분노는 오히려 "사회적 울분"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봐도 울분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이다. 그렇게 "공적인 울분"으로 정치를 시작하고,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비정상적인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는 거 아닌가? 뭐가 잘못됐다는 건가?

따라서 분노는 참여의 동인이고 에너지라는데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인제의 뻘짓으로 노풍은 더욱 거세졌다. 김민새의 뻘짓으로 노풍은 되살아났다. 정몽새의 뻘짓으로 노무현은 승리했다. 뻘짓에 분노한 대중의 참여가 아니고서는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분노마저 표현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변모한다. 냉소주의가 팽배하여 정치가 저급화되는 원인은 분노의 계기, 분노의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내가 쓰는 이 글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만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한국의 수구떼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얽히고 설켜서 유착, 결탁된 모습을 확인하면서 서프앙들이 분노하고, 그 분노로 인해 다시 각성하고, 그 각성으로 인해 또 다시 전투화 끈을 조이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작업도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잡소리가 너무 길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늘은 한국의 명문가문 제 3편 "김동조 가문"에 대해 캐 들어가보자.

△ 김동조 ⓒ 엠파스 검색

김동조라는 사람은 부산 출신이다. 우리가 흔히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알고 있다. 왜 거목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수구언론에서 그렇게 부르니 그런 거 보다 하는 거다.

그러나 고위 외교관료직을 수행했다고 해서 무조건 거목이니 뭐니 하고 불러주는 것에 대해 나는 반대한다.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했으며, 살면서 무슨 덕을 쌓았는지 그게 중요한 판단기준이어야지 무조건 고위 외교관료직을 수행했다고 해서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불러주면 어쩌자는 거냐? 한국외교의 산증인이라고 하면 그나마 이해하겠다.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일본 큐슈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후생성과 내무성에서 근무하면서 일제에 충성하는 것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사람이다.

한국전쟁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브루스 커밍스라는 유명한 학자가 쓴 "한국현대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인이 일본에 협력한 훨씬 더 대표적인 예는 김동조(金東祚)의 경우로서, 그는 동족인 한국인을 감시하는 경관으로 인생의 첫발을 내디딘 후,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과 한국 사이를 빈번히 오가며 일본에 징용된 수많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일본인들에게 밀고했다. 나중에 일본인들은 그를 승진시켜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다른 지급품들을 배급하는 전시 책임자로 삼았다.

1945년 이후 그는 미군정을 위해 역시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배급하는 일을 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신설 외무부에 들어가서 차관으로 승진을 했다가 퇴직했다. 그는 19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여당과 중앙정보부에 외교고문으로 복귀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에 기여한 후 그는 첫 주일 한국대사가 되었다.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일본 정치가들에게 뇌물을 준 매수꾼으로서 재일한국인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다.” 곧(1967) 그는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가 미국의회 방문을 준비하면서 1백달러짜리 지폐가 가득 든 봉투들로 서류가방을 채우는 것을 본 고용인이 그 사실을 폭로하는 바람에 큰 물의를 빚었다.>


사회가 어수선한 시점에서 체계도 안 잡힌 대한민국 정부하에서 일제 고급관료 경력으로 들어와 이곳 저곳 부처를 넘나들며 일하다가 느닷없이 외무부 정무국장이 되고 이승만정권하에서 불과 서른 여덟살의 나이에 외무부 차관이 되었다.

정통 외교관료도 아니고, 내가 보기엔 단순히 일본사람들과 가깝다는 이유로 승승장구한 거 같다.

충격적인 것은 굴욕적인 한일회담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수석대표였고, 주일대사였다는 점이다.

미국 중앙정보부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가 허겁지겁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서둘러 체결한 것은 군사쿠데타 직후부터 일본기업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받는 등 뒷거래를 해왔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혀낸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이 몸담고 있었던 꼬마민주당에서 96년 총선 당시 이 문제를 정치쟁점화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단순한 정치적 의혹제기로 폄하됐다.

△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맨 우측이 김동조 ⓒ 네이버 검색


어쨌든 그 선봉에 김동조가 있었던 것이다.

김동조가 수석대표로 나가서 체결한 한일회담의 성과라는 것은 참혹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확인된 일제치하 징병, 징용피해자가 총 103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약 8만명이 사망자이고, 3만명이 부상자였다. 그 가운데 겨우 8천명의 사망자 유가족에게 쌀 15가마 살 정도의 돈인 30만원씩 나눠주는 정도로 끝났다. 그렇게 형편없는 보상을 해주고도 개인청구권 문제는 흐지부지 처리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명확한 사죄도 문서로서 전혀 받지 못했고, 독도 영유권도 확실하게 해 놓지 못했고, 피해자의 생사확인도 안 했고, 피해자 통계도 제대로 안 냈고, 사망자 유해발굴 문제도 논의하지 못했고, 위안부 및 원폭 피해자 문제는 거론조차 안했고, 징용 사할린 동포 처리문제도 꺼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대표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측의 제공은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협력이라는 기본적 사고를 갖고 있다"

이렇게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굴욕적인 협정을 돈 몇 푼 받고 체결하는데 김동조는 앞장섰던 것이다. 과연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장희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한일협정은 일본의 전범세력과 한국의 친일세력이라는 부도덕한 두 세력이 역사의 지배세력으로 등장, 야합하여 만든 합작품이다. 그래서 한일협정은 몇 푼의 돈에 혈안이 되어 일제식민지 과거사 인식을 전면 외면함으로써, 그에 부응한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해 매우 불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어쨌든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마디의 사과도 없는 그런 비정상적인 한일협정을 맺는데 앞장선 공로로 김동조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미국이라면 끔뻑 죽던 시기에 주미대사를 무려 6년이나 하면서 유신정권을 합리화하는 첨병이 되었다. 그리고는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어 2년여간 활동하다가 그 후 박정희의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직을 2년여간 수행하며 반민주적 유신체제 수호의 간성이 된다.

유신 말기 난데없이 한국석유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하다가 박정희정권이 붕괴하고 나서는 관직에서 물러나서 느닷없이 변호사 개업을 한다. 김동조의 약력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가 어떤 근거로 왜 변호사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모든 게 어수룩한 시기였다.

어쨌든 이런 대단한 이력을 가지고 김동조는 거대한 혼맥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김동조의 부인은 약사이다. 약사출신인 부인 송두만과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 김대영은 그다지 뚜렷한 움직임이 엿보이지 않는다. 차남 김민영은 현재 외국어대 무역학과 교수이다. 김민영의 부인은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인 정다미다.

장녀 김영애는 스스로 거물급 인사다. 모건스탠리 부사장이다. 오히려 김영애의 남편 최융호의 이력이 부인에 비해 밀린다.

차녀 김영숙은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손원일의 장남 손명원과 결혼을 했다. 손원일의 부친이 유명한 손정도 목사다. 손명원은 현대미포 사장과 쌍용자동차 사장을 역임했다.

세째 딸 김영자는 GS그룹 허씨 집안에 시집을 갔다. 남편이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사장이다.

막내 딸 김영명은 우리가 몽새라고 부르는 정몽준과 결혼을 했다.

이렇게 보면 별거 아닐 거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혼맥은 사실 대단한 것이다.

차녀 김영숙과 사위 손명원 사이에 낳은 손정희가 영화배우 남궁원의 천재 아들이라는 헤럴드경제신문 사장 홍정욱과 결혼을 하였다. 김동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헤럴드경제신문이 특히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외손녀 사위가 운영하는 회사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이 헤럴드경제신문은 노태우의 사돈인 신명수가 창업한 회사이다. 이 점은 특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말 문제는 세째 딸 김영자다. 김동조의 세째 딸 김영자와 사위 허광수 사이에서 낳은 허유정의 남편이 현재 조선일보에서 후계자 수업을 하는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의 아들 방준오다. 방준오가 김동조의 외손녀 사위가 된다는 말이다.

김동조의 세째 사위 허광수가 누구냐?? 바로 이병철과 더불어 삼성을 공동설립한 허정구의 세째 아들이다. 그 유명한 영남의 만석꾼 허만정의 손자이다.

허광수의 큰 형은 삼양통상 회장 허남각이다. 허광수의 작은 형은 GS 칼텍스 회장 허동수다. GS 칼텍스의 부회장은 김동조의 세째 딸인 김영자가 맡고 있다.

허광수의 누나는 누구냐? 바로 벽산그룹 회장 김희철의 부인 허영자다. 이 김희철의 동생이 바로 동양물산기업 대표이사 김희용이다. 김희용의 부인은 박설자다. 박설자의 아버지는 박상희다.

박상희가 누구냐? 바로 그 악명높은 박정희의 세째 형이다. 그러니까 김희용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되는 거고, 박근혜의 사촌형부가 되는 거다. 김종필과는 동서지간이 된다. 김종필의 부인 박영옥과 김희용의 부인 박설자가 자매지간이다. 둘 다 박상희의 딸들이다.

박상희의 아들로는 박준홍이 있다.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급 관리관인 정무조정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32살의 나이에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었다.

다시 김동조의 세째 사위 허광수로 돌아가자. 이 허광수라는 인물이 운영하는 삼양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도 결코 만만한 회사가 아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들이 그토록 미워하는 조선일보 류근일 주필이 바로 삼양인터내셔널의 사외이사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허광수의 작은 아버지 허준구는 LG건설 명예회장이다. 또 다른 작은 아버지 허신구는 LG그룹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막내삼촌인 허승조는 GS유통 대표이사로서 태광그룹 창업주 이임룡의 장녀 이경훈과 결혼을 하였다.

그러니까 이경훈은 허광수의 작은 어머니다. 이 이경훈의 동생 이재훈이 서울시장을 지낸 양택식의 아들 양원용과 결혼을 했다. 이 양택식의 동생 양기식의 딸 양경희가 중앙일보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와 결혼을 했다.

조중동은 한 집안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서 나온 얘기다.

허광수를 중심으로 본다면 허광수의 딸 허유정이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의 장남 방준오와 결혼을 하고, 허광수의 작은 어머니 이경훈의 동생 이재훈의 시아버지 양택식의 조카딸 양경희가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와 결혼을 하고, 허광수의 작은 어머니 이경훈의 동생 이재훈의 시아버지 양택식의 조카딸 양경희의 조카딸 이서현이 동아일보 회장 김병관의 아들 김재열과 결혼을 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다른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고, 삼양인터내셔널 허광수를 중심으로 볼 때 이렇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김동조의 후손들이 얼마나 막강한가?

지금 김동조의 막내 사위 정몽준과 부인인 막내딸 김영명의 인맥을 더한다면 이것은 거의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사돈에 사돈에 사돈에 사돈을 연결하면 대통령까지 다 연결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다 헛소리다.

그것은 한국의 폐쇄적인 그랜드 서클을 무시하는 발상이다. 설령 가물에 콩 나듯이 어쩌다가 개천에 용나는 식으로 폐쇄적인 그랜드 서클에 누군가가 진입했다 하더라도 그 것은 단지 그 사람 하나가 들어간 것에 불과할 뿐이지 확고하게 입성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런 증거도 없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시골에서 농사 짓는 집안의 딸은 뒷집으로 시집간다. 그 뒷집 딸은 그 앞집으로 시집간다. 그 앞집 딸은 또 그 옆집으로 시집간다. 이래 가지고 어느 천년에 이건희회장 집안에 도달하느냔 말이다. 사돈은 농민, 그 건너사돈도 농민, 그 건너사돈도 농민...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돈의, 그 사돈의, 그 건너사돈을 다 뒤져봐도 실상 다 똑같은 서민들이고,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다.

주위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사례를 찾을 수가 없다. 한국 그랜드 서클의 폐쇄성과 고립성과 배타성과 경직성을 민주개혁세력은 주목해야 한다. 한국 수구 겹사돈 모임을 무시하면 안된다. 한국의 기득권은 바로 이런 강고한 카르텔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개혁을 원하지 않는 강력한 기득권 세력들이 혼맥을 통해서 거대한 망을 형성하고 저항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거의 상식이다.

정몽준이 2002년 12월 18일 밤 10시에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노무현후보를 왜 버렸겠나?

혹시 노무현후보에게 적대적인 조선일보의 후계자 조카사위 방준오의 얼굴이 아른거리지 않았을까?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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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가문 (제 4 편) - 노신영家


한국의 명문가문은 2005년 9월에 피투성이님이 서프라이즈에 연재한 12편의 대한민국 명문가문들에 대한 글이다.

오늘은 한국의 명문가문 제 4편 "노신영"가문을 알아보자.


노신영은 외무고시를 통해 관계에 입문한 정통 외무관료 출신이다. 노신영은 김동조와 관련이 깊다. 김동조가 외무부 장관으로 있을 때 노신영이 외무부 차관에 임명됐다. 김동조는 이동원과 끈끈한 관계다.


내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노신영은 정일권과도 상당한 교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차관시절 국회의장인 정일권에게 유신헌법 신임에 관련된 이야기를 발설한 것도 그렇지만, 둘 다 이북출신으로서 모종의 신뢰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 사건으로 차관자리에서 해임되었지만, 박정희도 노신영의 능력을 인정했던 모양이다. 매장시키지 않고 주 스위스 제네바 대사로 임명하여 다시 썼다. 


광주피바다 위에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자 노신영은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군벌 + 테크노크라트


노신영은 신군부에 순종하며 협력하는 외무부 장관으로서 대외분야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 전두환의 신임을 받으며 2년 8개월간 안기부장을 지냈고, 또 국무총리까지 지내며 노태우와 차기를 놓고 기싸움을 벌일 만큼 강력한 힘을 행사했다.


이른바 노노체제다.


전두환 정권이 물러가고 노태우정권이 들어선 이후, 노신영도 권력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이후 연구소에 근무하기도 하고,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으로서 착한 사람 얼굴로 쭉 살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노신영을 용서하지 않는다.


노신영에 관련된 사안 가운데 가장 끔찍스러운 것은 "정형근"의 발탁이다. 안기부장 시절 가장 유능한 검사라고 정형근을 안기부로 끌어들인 자가 바로 노신영이다.

▲ 노신영 ⓒ 엠파스 이미지검색


노신영은 전두환에게 철저하게 충성하여 깊은 신임을 얻었다. 전두환이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정황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군벌들이 펄쩍 뛰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노태우와 경쟁하면서 최고권력을 지향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여튼 간에 노신영의 실체는 뭐냐?


노신영은 전두환에게 운좋게 신임을 얻어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군부철권통치자들의 지배연합 내부에 기생하면서 테크노크라트로서 군부세력에게 전문적 지식을 가미해주고, 군부지배의 폭정을 합리화해주고, 포악한 군부를 대신해서 대국민홍보에 동원되는 하위파트너 역할을 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남덕우니 진의종이니 김상협이니 유창순이니 다 이런 무리들이다. 전두환의 시국수습용 카드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권력 분점의 떡고물을 챙긴 것이다.


또 재벌과 군부와의 매개체 역할도 이들의 임무였다. 대중을 군부와 엮는 것도 이들의 영역이었다.


군부에 의해 급조된 전두환의 민정당이 대중정당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민정당은 정당정치에 기반해서 형성된 정당이 아니므로 정치력도 매우 미약하였다. 따라서 신군부에게는 노신영같은 군사독재체제를 합리화 시켜줄 경험많은 인물이 필요했다. 공작정치의 소모품이었을 수도 있다. 또 대미관계를 원활히 조율할 필요성도 느꼈을 것이다.


또 하나는 하극상으로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이 늘 정통성 시비를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노신영류의 박정희 이래의 관료세력이 여전히 전면에 있음으로써 국민적 저항을 다소 무마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노신영은 광주 피바다를 묵인하고, 국가적 폭력을 애써 외면하며 정통성 없는 정권찬탈세력의 핫바지, 얼굴마담, 바지사장, 집 지키는 개 노릇을 하면서 최고권력을 구가할 수 있었다.    


결국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축소 사건의 책임으로 정계를 떠났다.


2002년 9월 우리는 노신영을 다시 정치의 무대에서 볼 수 있었다. 현승종, 남덕우 등 단골 멤버들과 더불어 이회창 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에 귀빈으로 참가한 것이다. 따라서 전두환 = 이회창이라는 등식은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노신영이 단지 군사독재자 주변에서 권력의 단맛만을 맛본 것이 아니라 그 힘으로 화려한 혼맥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깨뜨리기 어려운 철옹성같은 기득권이다. 어쩌면 영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노신영은 3남 2녀를 두고 있다.


큰 아들 노경수는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로 있다. 요즘 서울대 대외협력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영국 더 타임즈와 같은 일간지들의 대학평가 방법이 잘못됐기 때문에 서울대의 국제적 평가가 낮다는 논리를 부르짖고 있다.


어쨌든 이 노신영의 큰 아들의 장인이 세상을 떠난 "포니 정" 정세영회장이다. 그 덕에 노경수는

▲ 정세영  
ⓒ엠파스 이미지검색
70만주의 현대산업개발 주식을 상속받았다. 부인은 정숙영으로서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의 누나다. 


노신영의 큰 며느리 정숙영의 동생 정몽규는 코오롱 이웅렬, SK 최태원 등과 고려대 동문으로서 예전부터 절친하다. 이 클럽은 늘 민주개혁세력의 요주의 관찰대상이다. 그 핵심에 코오롱 이웅렬이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삼성 이재용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쌓는 것 같다. 이 멤버에 노신영의 작은 사위 풍산회장 유진이 있다는 것도 말할 나위 없다.


정몽규의 부인은 대한화재보험 김성두 사장의 딸 김나영이다.


노신영의 큰 며느리 정숙영에게는 파크 하얏트 호텔 사업에 관여하고 있는 정유경이라는 여동생도 있다. 정숙영의 여동생 정유경의 남편은 김종엽이다. 노신영의 큰 아들 노경수의 동서가 되는 이 김종엽은 누굴까?  민주개혁세력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인물이 아니다.


김종엽은 김석성의 막내아들이다. 김석성은 전방 전 회장으로서 전방 명예회장 김창성의 사촌동생이다. 김창성이 누구냐??  얼마 전까지 경총회장을 지냈고, 현재 경총 명예회장인 바로 한나라당 염창동 당사의 주인이다. 아주 염가에 가난한(?) 한나라당에게 빌딩을 임대해 주고 계신 분이다.


이 김창성의 동생이 바로 우리 유시민 의원이 지난 대통령 선거 즈음 중국 북경에 가서 간첩과 접선하고 돌아왔다고 떠벌리신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이다. 이 김무성의 누나가 현대그룹 회장 현정은의 모친인 용문학원 이사장 김문희로써 얼마 전에 아버지 김용주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박근혜와 이회창의 돈독한 자리를 마련해주신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 바로 그 분이다.


이렇게 볼 때 노신영의 큰 아들 노경수의 인맥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지금 귀찮아서 이름에 "몽"자 들어가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전부 제외시켰다. 또 정씨 가운데 이름 뒷자리에 "영"자 들어가는 그 수많은 삼촌뻘 되는 사람들도 전부 제외시켰다.


게다가 노신영 가문 혼맥의 백미는 둘째 아들 노철수다. 바로 홍진기의 막내 딸 홍라영과 결혼하였다. 이로써 노신영의 차남 노철수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동서지간이 되고, 중앙일보 홍석현과 처남 매제 지간이 되며, 삼성의 후계자 이재용의 이모부가 되고, 동아일보 김병관의 차남 김재열 또한 노철수의 조카사위가 된다. 노철수는 삼성에서 경영을 배운 후 독립하여 스스로도 꽤 큰 사업을 벌이고 있다.


얼마나 빵빵한가?


그러니 호텔대전이니 뭐니 하는 신문쪼가리들의 기사는 전부 우스꽝스러운 집안싸움이 된다. 신문쪼가리를 보면 삼성 이건희 회장의 큰 딸 이부진이 호텔신라에 공을 들이고, 또 신세계 이명희 회장의 딸 정유경이 조선호텔에 정력을 쏟고,  정세영회장의 딸 또 다른 정유경이 파크 하얏트호텔에 힘을 쓴다면서 피말리는 엄청난 호텔업계의 대접전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신라호텔 이부진과 조선호텔 정유경은 사촌지간이다. 게다가 파크하얏트호텔 정유경이나 신라호텔 이부진은 노신영 가문을 매개로 다 이어지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건너사돈밖에 안 된다.


어쨌든 이름도 별로 안 알려진 노신영의 아들들 노경수, 노철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삼성가문, 현대가문이 좌청룡 우백호로 버티고 있고, 그 막강한 동아일보, 중앙일보가 뒤에서 받쳐주니 왕후장상이 따로 없는 것 아닌가?  아버지 덕분에 인생은 탄탄대로, 그야말로 기호지세다. 세상에 두려운 게 뭐가 있으랴??


그 뿐인가??


노신영의 둘째 딸 노혜경이 요즘 소전 만들어서 대박 터뜨리고 있는 풍산 유진회장에게 시집갔으니 이것은 더할 나위없는 파워가 아닐 수 없다.           


유진은 브이소사이어티라는 민주개혁세력이 집중감시하는 조직의 핵심멤버로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호되게 당한 유찬우의 아들이다. 비록 이혼하긴 했지만 유진의 형수가 박정희의 둘째 딸 박근영(후에 박서영이라고 개명)이다. 


요즘 유진은 전경련 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이다. 유진은 특유의 사교성으로 그 아버지 유찬우에 이어 미국 부시가와 교류가 두텁다. 미국 국무장관 파월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전세기까지 제공하기도 했다. 그의 부인 노혜경(우리가 아는 그 노혜경 아님)도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바바라 부시와 친분이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미국 공화당 인맥과 가장 가까운 집안이 바로 노신영의 사돈인 이 유찬우 집안이다.


김원기 국회의장이 얼마전 멕시코를 방문할 때 풍산 회장 유진과 유진의 손윗 처남, 그러니까 노신영의 큰 아들 노경수가 함께 김원기 의장을 수행했다. 노신영의 장남과 사위가 왜 김원기 국회의장을 수행하지??


김대중 대통령 이래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할 때는 늘 노신영의 사위 유진이 수행한다.


어쨌든 간에 현대, 삼성,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배경도 모자라 이 노신영 가문은 미국 공화당 인맥에까지 깊숙이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명문가문(?) 반열에 오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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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가문 (제 5 편) - 김치열家


 

한국의 명문가문은 2005년 9월에 피투성이님이 서프라이즈에 연재한 12편의 대한민국 명문가문들에 대한 글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김치열의 이름을 발견하고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김치열의 조상에 관련된 신문보도를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김치열은 사성 김해 김씨다. 현재, 이 사성 김해 김씨는 전국에  불과 2000세대 밖에 되지 않는다. 기존의 김해 김씨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성씨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이었던 왜장 사야가가 이 사성 김해 김씨의 시조다. 이 왜장 사야가는 부산 동래에 상륙하여 "명분없는 전쟁은 불가"라며 조선에 투항, 조선왕실로 부터 김해 김씨와 충선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이다. 임금이 내린 김해 김씨라 하여 사성 김해 김씨의 시조라고 부른다.


그 선조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투항한지 불과 300년만에, 그의 후손 김치열이 또 다시 이 나라를 배신하고 일본제국주의에 협력을 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으니 이 왔다리 갔다리 행각이 얼마나 웃긴 일인가?


친일인명사전 법조부문 1차 명단에 김치열의 이름은 부끄럽게 걸려 있다.


김치열은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법조에 발을 들여놓은 인물이다.


김치열은 이승만 정권 시절 서울지검장까지 지냈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지자 재야로 돌아가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10년 정도 세월을 보내다가 갑자기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유신체제가 들어서자 화려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내가 보기에 일단 현재 박근혜의 지역구인 대구 달성 출신이라는 것이 주효한 모양이다.  


중정차장을 3년 정도 역임한 후, 2년간 검찰총장을 지내고, 또 3년 동안 내무부 장관을 거쳐,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박정희가 죽는 순간까지 현직에 있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다. 또 당시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의문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치열은 천연덕스럽게 최종길 교수는 자신의 간첩행위가 밝혀지자 남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투신한 악질 간첩이라고 발표했다. 얼마 후 김치열은 검찰총장으로 영전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의 억울한 생명을 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 검찰이 사형을 구형할 때 김치열은 검찰총장이었다.


그 뿐인가?  남영동 대공분실을 만든 것도 김치열이었다. 아직도 남영동 대공분실에는 "1976년 내무부 장관 김치열"이라는 머릿돌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대공분실에서 김근태 장관이 전기고문을 당했고, 잔혹한 물고문으로 박종철 열사가 숨을 거두었다.


내무부 장관 시절 김치열은 치안본부 특수수사대 사직동팀과 신길동팀을 만들어 박정희의 특명사건을 수사하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박정희가 죽는 순간까지 유신에 충성하는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민중을 짓밟고, 독재권력을 강화하는데 헌신했다.


이런 김치열이 1980년 들어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이후락, 김종필 등과 함께 부정축재자로 지목당하였다.


그래서 부정축재로 모은 재산 200억 원을 국가에 헌납하는 각서를 썼다. 그런데 그 때 빼앗긴 땅이 지금 1000억 원도 훨씬 넘게 뛰어올랐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임야 1만평의 시가가 1000억 원이 훨씬 넘게 된 거다. 그 때 빼앗긴 경기도 4만 4천 평의 땅도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남의 눈에 피눈물 나는 짓을 일삼아 했던 김치열, 자신의 억울함은 참을 수 없었나 보다. 국가를 상대로 준재심 청구소송을 걸어 승소판결을 받았다. 이거 얼마나 훌륭한 재테크인가?


천인공노할 국가범죄에는 시효가 적용되고, 이런 재판은 시효도 없나보다.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해 협조해달라는 요청에 이후락, 김치열은 지병을 핑계로 계속 거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지 재산 찾는 데는 아주 열심이다.


2001년부터 죽는 시늉하며 엄살 떨더니 여태 살아있다.


8명의 귀중한 생명을 한 순간에 앗아간 권력기관의 총 책임자였던 김치열...


지나간 죄악에 대해 회개하고 그 유가족들의 고통을  100분의 1이라도 갚을 수 있는 갱생의 길을 찾을 생각은커녕 박근혜 고액후원자 명단에 빠지지 않고 올라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꿈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는 듯하다. 돈으로 후원할 뿐만 아니라 남덕우 등과 더불어 박근혜의 대표적인 조언자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박근혜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거다.


노환, 지병 때문에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해 진실을 고백할 힘은 없으면서 박근혜를 조언해 줄 수 있는 힘은 펄펄 솟아나나?  독재자 하수인으로 민중을 탄압하고 속였던 경험을 박근혜에게 전수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어쨌든 김치열은 독재정권의 주구로 충성하며 민중을 짓밟은 대가로 막강한 금력과 권력을 형성, 이 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떵떵거릴 만한 화려한 혼맥을 구성하였다.


우선 김치열의 큰 딸 김윤희는 백낙서와 결혼하였다. 백낙서는 인제대 석좌교수다. 김윤희도 고려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김치열의 사위 백낙서의 집안도 만만치 않다. 이 집안이 그 유명한 인제대 백인제 가문이다. 백용제, 백봉제, 백인제, 백붕제 4형제가 있었다.


그 가운데 백인제, 백붕제가 인제대 백병원을 설립한 것이다. 백인제는 의사였고, 백붕제는 일제 치하에서 사법, 행정과를 패스하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군수로 발령받아 재직하다가 변호사 활동을 하던 자였다. 그들은 모조리 6.25 때 납북되고 말았다.  


그 이후 백씨 가운데 "낙"자 들어가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시기가 되었다. 백인제의 아들 인제대 전 이사장 백낙조, 백붕제의 아들 인제대 현 이사장 백낙환 등이 인제대를 이끌어 나갔다.


김치열은 백씨들의 인제대 서울 백병원 설립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김치열의 사위 백낙서는 백붕제의 아들이다. 유명한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지낸 서울대 명예교수 백낙청도 백낙서의 형이다.


진보진영에 서 있는 이 백낙청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민주개혁세력이 실눈을 뜨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면 최종길 교수 추모식 같은 곳에 백낙청은 항상 자리를 함께 한다. 그런데 최종길 교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그의 사돈 김치열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실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돈을 찾아가서 항의해야 하지 않을까?


반면 백낙청의 형 백낙환은 자신의 인생에 세 명의 은인 가운데 김치열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완전히 이율배반이다. 백낙청은 자신 집안의 이율배반부터 정리해야 할 것이다.


개탄스러운 것은 열린우리당 멍텅구리 아저씨들 가운데 요즘 백낙청을 국무총리로 만들어주려는 발상을 하는 자들이 있다. 소위 열린우리당 재야파들이 어제 오늘 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내 정보망에 들어왔다.


헐..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이해찬 총리가 물러나면 김치열의 사돈인 백낙청을 총리로 앉혀야 한다니 제 정신인가?? 세상에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이부영 전 의장은 정치 그만두신 거 아니었나?


다시 김치열로 돌아가자.


김치열의 둘째 딸 김영경이 김정수라는 자와 결혼을 했다. 이 김정수라는 자는 농림부 차관을 지낸 효성기계공업 회장 김종대의 아들이다.


이 효성기계공업 회장 김종대의 둘째 딸 김은주가 동성개발 회장 조욱래랑 결혼을 했으니 효성그룹과 연결이 된다. 조욱래의 큰 형이 조석래 현 효성그룹 회장이고, 조욱래의 작은 형이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이다.


이 김종대의 누나가 신동방 창업주 신덕균의 부인 김영자다. 그러니까 김치열의 딸은 이 신덕균의 조카며느리가 된다는 말이다.


신덕균의 아들 신명수는 김치열의 사위 김정수의 고종사촌형이다. 알다시피 신명수의 딸 신정화가 노태우의 며느리다.


김치열의 큰 아들 김형국의 부인이 조양상선 그룹 박남규 회장의 딸 박재숙이다. 박재숙의 오빠, 그러니까 조양상선 회장 박남규의 네째 아들 박재준이 농심그룹 회장 신춘호의 장녀 신현주와 결혼했다. 현재 신현주는 농심기획 상무이사로 있다.


신현주의 큰 아버지가 그 유명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이다. 이 신현주의 여동생 신윤경이 태평양그룹 서성환 회장의 아들인 현 태평양 대표이사 서경배와 결혼하였다.


서경배에게는 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서영배다. 서영배의 부인이 방혜성이다. 방혜성의 아버지가 그 악명높은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이다. 알다시피 방우영의 형이 "밤의 대통령" 방일영이고 방일영의 아들이 바로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이다.


김치열의 아들의 부인의 오빠의 부인의 여동생의 남편의 형의 부인 집이 바로 조선일보라는 거다. 더 줄여서 말하면 김치열의 며느리의 시누이의 제부의 제수씨 집이 바로 조선일보라는 거다.


막내딸 김혜림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서봉균의 아들 서원석과 결혼하였다.


이렇듯 <군벌 +  관료 +  재벌 + 언론 +  서울대 학벌>이 만들어 내는 불쾌하고 음습한 5중주가 바로 대한민국 수구기득권 세력의 모습이다. 물론 그들이 친일세력을 계승하는 집단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김치열, 명문가문, 서프라이즈, 피투성이



한국의 명문가문 (제 6 편) - 정일권家


 
한국의 명문가문은 2005년 9월에 피투성이님이 서프라이즈에 연재한 12편의 대한민국 명문가문들에 대한 글이다.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유용선


내 나이 여섯살 적에

아버지와 함께 간 그 냄새나는 식당,

그 옆에 냄새나는 변소,

그 앞에 묶여 있던 양치기,

는 그렇게 묶인 채로 내 엉덩이를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 물어.

그 새끼 그 개만도 못한 주인새끼의

그 말만은 믿지 말았어야 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번번이 짖는 개에게 물렸다.


사랑을 부르짖는 개,

는 교회에서 나를 물어 뜯었다.

정의를 부르짖는 개,

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덮쳤다.

예술을 부르짖는 개,

는 백주대로에서 내 빵을 훔쳐 달아났다.


괜찮다, 괜찮다,

는 개소리는 지금도 내 엉덩이를 노린다.

괜찮아, 괜찮아, 물지 않을 거야.

저 새끼 저 개만도 못한 새끼의

싸늘한 속삭임을 나는 도시 믿을 수 없다.


사실 이 시의 제목은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가 아니라 "우리는 지금도 개떼들한테 물리고 있다."라고 해야 맞다.


오늘은 한국의 명문가문 제 6편 "정일권가"에 대해 알아보자.

어릴 때부터 내 머리 속에는 정일권의 이름 석자가 뱅뱅 돌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린 시절 "多景峰"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붙이고 놀던 산이 있었다. 어두컴컴할 정도로 울창한 숲 속에 진달래가 활짝 핀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갑자기 전망좋고 양지바른 곳에 그야말로 호화찬란한 묘가 하나 나오는데 내가 세상 태어나서 본 적이 없을만큼 삐까뻔쩍한 묘였다. 바로 그게 나의 어린시절 놀이터, 정일권가의 묘소였다. 넓직한 잔디밭이 있어서 참 좋았다.


1980년대 초반이었으니까 당시 대다수의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을 때였다. 내가 오죽 아름다웠으면 그 산을 다경봉이라고 불렀겠나?  그 아름다운 산에 봉분을 만들어서 호석을 그야말로 휘황찬란하게 둘러 감아놓고 표석도 참 아름답게 해 놓았다.


그 주변에 수많은 무덤들이 있었지만 호석은 태어나서 처음봤고 그렇게 아름다운 고급석재로 된 상석이며, 표석 또한 그 처음 봤다. 해가 넘어갈 즈음 빽빽한 숲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 정일권 집안 무덤만 환하게 빛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고 감탄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대리석에 햇살이 반사되면 어두컴컴한 숲 속에 광채가 났다. 어린 마음에도 정일권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집 무덤을 보고 느꼈다.


정일권은 1917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지도를 보면 한반도의 최북단이다. 어쨌든 한반도의 최북단에서 태어난 정일권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정일권은 이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상으로 일본 군부대신의 군도를 선물로 받았다. 정일권 집에 놀러온 일본군 장교들조차 이 군도에 거수경례를 하고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고 한다.


그 후 번뜩이는 예복을 차려입고 자신의 모교 광명중학교로 가서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선동하고,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입교를 위한 진학지도를 했다.     


정일권은 그야말로 그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일본 육사 수석졸업에, 일본 관동군 사령관 전속부관으로서 화려한 견장을 하고, 허리에는 일본도를 찬 채 백마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이 왜 부럽지 않았겠나? 오로지 조선인 가운데 정일권만이 누리는 영광이었다.


이런 영광을 누리고 싶었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정일권의 언변에 혹하여 줄줄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을 했다. 만주군관학교에 그 해(1938년)에 입학한 조선 젊은이들이 13명인데 그 가운데 11명이 정일권의 광명중학교 후배들이다.

이 자들이 해방 이후 정일권을 정점으로 대한민국의 군을 지배했는데 소위 말하는 관북파, 또는 "알래스카 부대"라는 군벌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모조리 대한민국 군내에서 장성급의 요직을 담당했다.


정일권은 어쨌든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로 근무하면서 제국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는 조국과 민족의 비참한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침략자의 주구로서 활동하며 일신의 안위만을 누렸다.


그러다가 미군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정일권은 바빠졌다. 소련군이 선전포고를 하고 곧 일본군이 미군에게 항복하자 정일권은 재빨리 변신을 꾀하기 시작했다.


만주지역의 한국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일본 관동군 출신의 조선인 간부들을 모아 "만주교민보안대"라는 것을 만들어 스스로 사령관에 올랐다.


소련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정일권은 즉시 "만주교민보안대"를 잽싸게 독립군의 모습으로 변신시키고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로 이름을 바꿨다.

▲ 정일권 전총리 ⓒ엠파스 검색

심지어 독립군가까지 만들어 불렀다. 이 노래는 후에도 계속 애창되었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치는 애국의 깃발,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보아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을 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

어쨌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느닷없이 광복군 독립투사로 극적으로 둔갑하였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곧 정일권의 사기행각은 소련군 보안부대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는 곧 무장해제되고 강제해산 명령을 받았다. 또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 정일권은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정일권은 소련군에 체포된 후 소련군 수사관으로부터 소련 유학을 권유받아 유학을 결심하였으나 불합격하였다. 그 이유는 소련군 보안부대에서 정일권을 떠보기 위해서 친구 최 모를 시켜 "소련군 보초를 죽이고 도망치자"는 제안을 하게 했는데 정일권이 덜컥 수락함으로써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 것이다. 즉 소련군 보안부대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반동분자로 몰린 정일권은 시베리아행 숙청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드라마틱하게도 시베리아행 포로열차에서 탈출, 죽기살기로 월남하였다.

월남에 성공한 정일권은 즉시 미군이 운영하는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우수한 일본군 장교에서 독립군으로 변신하고, 소련군에게 체포되자 소련 유학을 결심하고, 극적으로 월남을 하여 영어학교에 입학하는 과정을 한번 보라!!!!!  변신의 대가 살아있는 꺼삐딴 리를 보는 듯하다.

정일권은 충실하게 미군정의 일제 잔재 부활 정책에 편승하여 미군의 신임을 얻고, 지리산에 은거하는 좌파들을 소탕하는데 앞장서서 이승만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5일 뒤, 1950년 6월 30일 불과 32살의 나이에 정일권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된다. 사단과 군단을 지휘해 본 적도 없는 자가 느닷없이 육군참모총장이 된 거다.


전쟁 중 소위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 정일권은 군복을 벗게 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군 윗대가리 새끼들이 전쟁 중에 군인을 양성하라고 국민방위군에 배정된 예산과 물자, 보급을 빼돌리고 죽자살자 달리기만 시켜 부지기수로 굶어죽이고 병들어죽이게 한 사건이다. 무려 젊은이들 천 수백명이 죽었다.


정일권은 이 사건으로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미국 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실로 다행이었다. 훗날 정일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만주의 숨통을 따라 30~50발의 원자탄을 줄줄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50만명에 달하는 중국 국부군을 압록강에 투입하고 우리의 뒷편인 동해에서 황해까지에는 60년 내지 120년 동안 효력이 유지되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을 것이다"


그 후 주불대사로 근무할 때 드골에게도 핵전쟁을 대찬성했다고 고백했다.

한마디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일권의 몰상식한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민족의 고통, 국토의 황폐화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승리만을 꿈꾸는 승리지상주의의 전형이다.


어쨌든 정일권은 1957년 합참의장, 육군대장으로서 22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한다. 그 이후 이승만의 궁정외교의 앞잡이가 되어 터키대사, 주불대사, 주미대사를 맡게된다.


▲ 한일협정 서명장면. 왼쪽 끝이 정일권. ⓒ엠파스 검색



주미대사직에 있을 때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 나흘 뒤 정일권은 하버드대 연구실에서 혁명을 도와달라는 박정희의 전화를 받게 된다. 정일권은 동분서주하며 군사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미국의 각계인사를 접촉한다. 물론 본국에서 김활란, 한경직 따위의 기독교인사들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이 또 박정희를 선전하기 위해 날아와서 정일권을 도왔다.

이 때 정일권은 박정희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제 3공화국이 시작되자마자 외무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처음부터 국무총리를 시키려고 했으나 모두 군출신인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한일회담 반대집회가 거세지자 정일권이 국무총리로 올랐다. 이로부터 무려 6년 7개월 동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정일권은 운 좋게 영국 처칠장례식장에서 기시와 가까이 앉아 대화할 수 있었다. 기시는 A급 전범으로서 사실상 만주국의 실권자였으며 한일 인맥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 정일권과 만주국 실력자 기시는 금방 친밀감을 느꼈다. 게다가 정일권은 만주 관동군 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난성회 회원이었으므로 더욱 문제될게 없었다. 이로써 순탄하게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정일권의 내각을 소위 불도저내각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일권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는 실상 박정희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일권은 무색무취한 스타일로서 철저한 YES맨이었다. 청와대에서 국정보고를 할 때도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만년마담"이었다. 바로 이런 식의 처세술로 박정희를 신처럼 떠받들며 무려 6년 7개월간 최장수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총리직을 6년 7개월간 수행한 후 물러나며 천하의 아부쟁이 정일권은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박 대통령 각하는 정말 진실한 분입니다. 그분의 영도력과 애국심은 언제나 나의 거울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자애로운 인간성은 번번히 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총리직은 물러나지만 그 분을 언제 어디서나 성심 성의껏 보좌해서 이 나라의 국력이 더욱 신장되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총리직을 마친 아부쟁이 정일권은 박정희에게는 유신헌법을 옹호할 국회의장으로서 적격의 인물이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통법부", "행정부의 시녀" 노릇이나 하며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국회가 "어린 아기나 보는" 무위도식 국회의 표상이 된 것이 바로 정일권이 국회의장이 된 9대 국회부터였다.

정일권은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헌법기관을 비방, 모독하는 것을 처벌토록하는 형법개정안을 날치기통과시켰다. 질의도 없고, 찬반토론도 없고, 심지어 의원 수 조차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통과시켰다. 김옥선파동이 일어났을 때도 낼름 처리했다.


그래서 국회의장 정일권의 일처리를 사람들은 "동사무소 직원이 사망신고서에 도장찍듯"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정일권은 사초에 손을 대기도 했다. 심심하면 속기록을 삭제하는 일이 정일권 국회의장의 취미였다.


이런 탁월한 능력 때문에 최장수 국무총리 기록과 더불어 최장수 국회의장의 기록도 보유하게 되었다. 자유와 인권은 엄청나게 손상시키면서도 외유나 세미나만은 매우 풍성하게 했던 국회의장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최장수 국회의장이면서도 가장 적은 회의일수를 기록한 국회의장으로도 역사에 남아있다.


정일권은 이외에도 숱한 의혹을 지닌 인물이다. 사생활도 상당히 문란했던 모양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정인숙사건이다. 그러나 나는 공적인 영역이 아닌 부분에 관해서는 별로 파헤치고 싶지 않다. 또 정일권 스스로 딱 한번 밖에 안 잤다고 하니 이 부분은 생략한다. 이 위대한 과업은 여성지들에게 부여한다.

박동선사건과도 연관이 있고, 통일교 문제도 정일권과 연관이 있으나 다 뻔한 얘기다.


자유총연맹 초대총재와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고문을 역임하다가 임파선암에 걸려 지난 1994년 죽었다. 정일권이 죽을 때 유언은 이것이었다. "전두환만큼은 정말 나쁜 놈이다."


어쨌든지간에 이 정일권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대한민국 주류로 행세하게 되었는데 정일권가의 후손들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일단 정일권의 후손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문명자씨가 쓴 글을 보면 정일권은 70년대 중반에 현숙한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새장가를 들어 3남매를 또 두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이면 예순의 나이인데... 헐.


어쨌든 내가 거금을 투자하여 각 신문 인물정보까지 뒤져보았으나 도대체 정일권의 자식들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건 내 책임이 아니다. 순전히 정일권 책임이다. 정일권의 부인도, 며느리도 모르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아나?

▲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엠파스 검색


파악되는 것은 정일권의 딸 정희경이 코오롱그룹 창업자 이원만의 동생인 이원천의 아들과 결혼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원천의 조카가 일본 와세다대를 나온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다.

이원천의 형, 이원만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동찬, 이동보가 그 들이다. 물론 이동구라는 아들을 나이 일흔 세살 때 낳았다고 한다. 참 그 기구한 얘기를 들어보면 아기가 불쌍하다. 그러나 사생활에 해당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옮기지 않겠다.


이원만의 아들 이동보는 김종필의 딸 김예리와 결혼했다. 곧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어쨌든 이원만은 상당히 정치지향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이원만의 둘째 딸 이미자는 포항의 대지주 박문학의 큰 아들 박성기와 결혼했다. 박성기는 한국 바이린 사장이다. 한국 바이린은 부직포산업의 선두주자인 다국적 기업이다.


막내딸인 이미향은 삼립식품 창업자 허창성 집안으로 출가했다. 태인샤니그룹 회장 허영인이 이미향의 남편이다. 베스킨라빈스니 던킨도너츠니 하는 것들이 다 이 집 거다.


코오롱 설립자 이원만의 큰 아들 코오롱 명예회장 이동찬의 장녀 이경숙은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의 세째 아들 이문조와 결혼하였다.


이동찬의 사돈 이효상, 대구출신으로 동경대를 졸업한 이 자는 정말 악명높은 반민주 인사다. 신라왕조 부흥 운운하며 영남공화국을 부르짖던 자다. 선거 때 지역주의를 최초로 부추긴 자다.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국회에 똥물을 뿌린 김두한을 앞장서서 제명하라고 요구했던 인물이 바로 이효상이다.


이효상은 선거 유세 때마다 이런 개소리를 하고 돌아다녔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이효상은 1963년부터 이런 말도 떠들고 다녔다. "대구는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임금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고장 출신의 박정희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임금님으로 모시자."


정말 이 나라를 위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물이다. 이효상은 이 따위 국민분열 획책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며 코오롱 재벌과 사돈까지 맺은 것이다.


이효상의 세째 아들 이문조는 현재 영남대 교수다. 이문조의 처가 코오롱그룹 현 회장 이웅렬의 큰 누나다.


나는 이효상의 또 다른 아들인 이문희를 눈여겨 보고 있다. 그는 신부로서 천주교 대구교구 대주교다. 현재 김수환의 바통을 이을 천주교 차기 추기경 물망에 올라있다. 말이 되냐??


코오롱 이동찬의 차녀인 이상희는 고홍명 한국빠이롯드 회장 집안으로 출가했다. 고홍명의 장남 고석진과 결혼한 것이다. 고석진은 코오롱제약(옛 삼영신약) 사장을 거쳐 에나멜동선 전문업체인 빠이롯드전자 회장을 지냈다.

코오롱 이동찬의 세째 딸 이혜숙은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자의 장남인 이동혁과 결혼했다.


코오롱 이동찬의 넷째 딸 이은주는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박정희 경제특보를 지내고, 한국은행장을 거쳐 전두환 신군부하에서 상공부 장관, 경제 부총리를 지낸 신병현의 며느리가 되었다. 남편 신영철의 의사다.

그런데 이 신병현이 봉명그룹 회장이자 문경학원 이사장인 이동녕과 사돈이다. 이동녕은 영남학원 이사장을 지낸 사람이다. 신병현의 딸 신수연이 이동녕의 아들 이승무와 결혼을 하였다. 이승무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서 국회의원을 하였다.


이동녕의 아들인 아세아시멘트 회장 이병무의 둘째 아들 이인범이 얼마전 삼양통상 허정구의 아들 그러니까 GS 칼텍스의 회장 허동수의 막내 딸 허지영과 결혼하였다. 허씨집안하고 맺어졌으면 만사 끝난 것이다. 


이동녕은 동양화학그룹 회장 이회림과도 사돈관계를 맺었다.

현 코오롱그룹 회장 이웅렬은 그의 동선이나 그의 배경을 볼 때 민주개혁세력이 의심의 눈초리를 결코 거둘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은 여러번 강조해 왔다. 결혼은 비교적 평범하게 하였다. 한 때 대한민국 고급벽지시장을 좌지우지 하던 동남갈포공업의 서병식의 딸 서창희와 결혼하였다.  

▲ 이웅렬 코오롱 회장 ⓒ엠파스 검색

다시 원위치하여 정일권 쪽으로 되돌아가자. 정일권의 아들 정세훈은 영풍그룹 창업자 장병희의 딸 장현주와 결혼하였다. 그의 처남 장철진, 장형진 등이 요즘 영풍을 주무르고 있다. 요즘은 31살짜리 정형진의 아들 장세욱이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나보다도 어린데 재산이 몇 백억원이다.

영풍 장병희는 박정희정권 하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김세련과도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침략기에 화려한 견장을 하고, 일본도를 허리에 찬 채 백마를 타고 위세를 부리던 정일권,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못지 않은 금력과 권력을 자랑하며 얽키고 설켜서 일제시대와 다를 바 없이 행세하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개떼들한테 물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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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가문 (제 7 편) - 전두환家


한국의 명문가문은 2005년 9월에 피투성이님이 서프라이즈에 연재한 12편의 대한민국 명문가문들에 대한 글이다.


전두환.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다. 심심하면 사람을 죽이고 못된 짓을 일삼은 인간이다. 정말 길거리에서 만나면 한대 걷어차주고 싶다. 갈아 마시고 싶다. 산채로 뜯어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정일권도 후세들에게 처음으로 옳은 소리 하나를 남기며 죽었다. "전두환만큼은 진짜 나쁜 놈이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전두환의 죄악을 여기서 다시 옮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지는 모르겠으나 "대한민국 만고의 역적 전두환"이 전직 대통령 운운하며 후세를 속일 염려가 있으므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큼직 큼직한 전두환의 패악을 상기시키는 것이 좋을 듯 싶다.

1. 하나회라는 군내 사조직을 만든 전두환은 권력에 눈이 멀어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대통령의 유고를 기화로 직권을 남용하여 군의 정식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계엄사령관을 불법적으로 체포 구금함으로써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패역무도한 역적질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숱한 인명을 살상하였음.

2. 비상계엄을 확대할 이유가 없는 것은 물론, 계엄해제를 요구받고 있는 상황에서 전혀 자격도 없고, 아무런 정통성도 없는 전두환은 국정을 장악하고 국회를 해산시킨 후 비상기구를 통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할 요량으로 군을 동원하여 전국을 위협적인 상황으로 만들고,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를 억압하고, 저항이 예상되는 인사들을 불법적으로 체포하여 헌법기관을 강압과 폭력에 의해 전복시켰다.

3. 또한 전두환은 이에 항의하는 민중들을 탄압하고, 체포하였다. 특히 전두환은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자신의 천인공노할 역적질에 분노하여 불같이 일어선 광주양민들을 향해, 특전사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무자비하게 총질, 칼질을 가해 사망 207명,행방불명 70명, 중상 3193명, 구속 1589명이라는 피해를 입히며 광주를 피바다로 만드는 등,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살인마 짓을 벌였다.


△ 518 광주민주운동 ⓒ 엠파스 검색

4. 이런 살인마 날강도같은 폭정에 항거하는 언론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전두환은 허문도 등에게 소위 "언론계 정화 정비계획"을 만들게 하여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언론자율정화 및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하게 하여 자율정화 형식을 취한 후 933명의 언론인을 무더기로 해직시키고, 64개 매체를 18사로 통폐합하여 여론조작 및 왜곡 등 대국민 사기질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5. 전두환은 광주 피바다 위에 획득한 막강한 권력을 통해 신나는 협잡질, 도둑질을 시작했다.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재정경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최고결정권자로서 권력을 남용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사업자 선정, 신규사업의 인·허가, 금융지원, 세무조사 등 구체적 사항에 대하며 직접 또는 간접적인 권한을 불법적으로 행사함으로써 돈을 받아 처먹기 시작했는데 건설, 철강, 기계, 자동차, 금융, 정보통신, 석유화학, 조선, 전기, 전자, 섬유, 교통, 식품, 유통,위락, 체육시설, 등 각종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체들의 활동에 있어 직무상 또는 사실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것을 악용하여 처먹고, 처먹고, 또 처먹고, 친구도 처먹고, 사돈의 팔촌까지 다 처먹었다. 측근이니 가족이니 모조리 다 설치고 다 날뛰었다. 부정부패가 판을 쳤다. 정주영에게 220억원을 받아 처먹고, 이병철에게 또한 220억원을 받아 처먹고, 조중훈에게 160억원을 받아 처먹고, 최원석에게 180억원을 받아 처먹고... 그 때 물가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되는 걸 감안한다면 받아 처먹은 돈을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수조원에 이른다.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사를 보면 정말 어이가 없다.


△ 전두환 대통령 취임선서 ⓒ 엠파스 검색

"권력을 이용해 수 십억 원 또는 수백 억원의 재산을 긁어모은 정치인이 있고…(중략)…이와 같은 부조리와 부패를 그대로 놓아둔다면,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부의 분열과 갈등으로 나라의 존립마저 크게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6. 전두환 자신이 천하에 다시 없을 살인마, 도둑놈, 사기꾼 주제에 사회를 정화하겠답시고 죄값을 이미 치뤘거나, 별로 죄도 없는 사람들을 불법적으로 삼청교육대라는 걸 만들어 무려 4만 9천명이나 끌고 가서 강제노역, 구타, 살인 등 극심한 인권유린을 통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수백 명에, 지금도 그 후유증에 떨고 있는 사람이 2000명이 넘는다.

7. 썩어 빠진 스스로를 개조해야 할 전두환이 착하고 어린 학생들의 사상을 개조한답시고 군대로 강제로 끌고 가서 온갖 폭력과 가혹행위를 동원하여 특별정훈교육을 시켰던 소위 녹화사업. 그 때 끌려간 학생들이 무려 1100명이다.

이외에도 군사쿠데타를 통해 얻은 불의한 정권을 유지하고자 간첩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공작, 또한 민주화세력을 예봉을 꺾기 위한 반인권적 폭력과 전기고문을 비롯한 살인적인 고문을 마다하지 않았고, 정의를 부르짖는 학생과 시민들을 감옥으로 끌고 가서 국가보안법 누명을 씌우고, 그 때 어디로 끌고 가 얼마나 사람을 죽였는지, 몰래 어디다가 얼마나 파묻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 가운데 숱한 민간인 사찰이 자행되고 감시와 미행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이런 파렴치한 악마같은 죄악을 저지르고도 반성을 하기는커녕 "본인은.." 운운하며 지도 대통령이랍시고 모가지에 공그리를 치고 뻣뻣하게 오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남의 자식을 수천 수백 명이나 죽이고, 다치게 하고서도 지 손자 손녀는 예쁘다고 행복한 듯 껴안고 있는 꼬라지를 보면 당장 연희동으로 쳐들어 가 가스통을 터뜨려 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저런 새끼는 크레모아로 아작을 내야 한다.

"본인이 이 와중에 무슨 재산에 미련이 있겠습니까. 139억원을 국고에 헌납하겠습니다."

처 먹은 돈은 수조원인데 국민을 상대로 장난을 치면서 백담사로 향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중에 김영삼 정권 때 구속 직전에 골목에서 주접떨던 꼴을 생각하면 뻔뻔스럽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 하다. 노무현의원이 분을 참지 못하고 명패를 집어 던졌던 심정이 1000% 이해가 간다.

사람이 죄악을 저질렀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반성하고, 통회하면 일말의 동정이 간다. 그런데 이 자는 회개, 반성, 통회는 커녕 부끄러움을 모르고 오히려 큰 소리다.

요즘도 지가 무슨 정치인이라고 찾아온 사람들한테 훈계를 하는 꼴을 보면.. 쯧쯧쯧

저 인간을 편안하게 침대에서 죽게 할 수는 없다고 부르짖는 유시춘선생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다고 본다. 전두환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져서 살 수가 없다. 저런 거악을 그대로 두고, 정의와 상식을 말한다는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이순자가 소갈비 뜯어서 아가리에 처넣어주는 거 보면 참 기가 차다. 다리가 잘라진 광주의 피해자들은 지금도 고통스런 삶을 살고, 전두환의 총칼에 의해 자식을 잃고, 동생을 잃은 사람들은 아직도 울부짖고 있는데... 국립묘지에 쥐새끼처럼 들어가서 참배를 하지 않나, 골프장에 가서 골프를 치질 않나,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질 않나... 으휴, 속 터진다. 제 명에 못 살겠다.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그렇게 죽이고, 인생을 조져놓고 소갈비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나?? 죄를 저질렀으면 부끄러움을 알아야지, 그 측근 장세동이는 왜 이렇게 눈깔을 무섭게 굴리고 지랄인가?? 지가 아직도 안기부장인 줄 아나?


△ 이순자 ⓒ 엠파스 검색


이게 전라도, 경상도의 문제인가? 니미럴 놈의 세상.. 이게 나라냐, 뭐냐??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저 놈의 인맥이 어떻게 뻗어 있는지를 한번 따져보자.

두환이는 알다시피 순자랑 결혼을 했다. 순자는 이규동의 장녀다. 두환이의 장인 이규동은 준장으로 전역한 군 출신이다. 현재 대전국립묘지 장군 1 묘역에 묻혀있다.

이규동은 사실 대전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이 없는 인물이다. 한국군 생활 몇 년 하지도 않은데다가 일본 만주군 경리관 출신이다. 전형적인 친일파다. 이규동이 죽었을 때 그에 대해 얘기하는 언론은 하나도 없다. 육사 2기래나?? 지랄 옆차기...

전두환이 살고 있는 연희동 저택의 본채 500평도 이규동이 물려준 것이다. 본래 돈이 굉장히 많았던 모양이다. 경리감 출신이니 돈에 밝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전재용의 괴자금 130억원도 이규동의 돈이었다고 주장할 만큼 돈이 많았던 모양이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정말 개떡같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던 전두환의 85년생 손녀 전수현이 가지고 있는 강남구 논현동 116평짜리 시가 30억원짜리 음식점도 이규동이 전두환의 아들 전재국에게 물려준 것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88년생 전수현의 남동생 전우석이도 마포구 서교동에 10억원짜리 86평짜리 땅을 가지고 있다.


△ 이규동 ⓒ 네이버 검색

하여튼 이규동도 자기 사위가 정권을 탈취하자 마자 대한노인회 회장을 지내며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꽤나 설쳤던 모양이다. 명성그룹 사건의 배후라는 말이 그다지 신빙성없는 것 같지는 않다. 잣나무 묘목 26만 그루를 경기도에서 무상으로 받아 서울시에 26억원어치를 되판 사실 때문에 정권이 바뀐 뒤 국회에 출석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 이규동의 둘째 딸 이신자는 홍순두라는 자와 결혼을 했다. 전두환이 쿠데타 일으키기 전에는 그냥 조그만 해운회사 총무부장직에 있다가 느닷없이 대한통운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느닷없이 항공화물 업계의 대부가 되었다. 벼락감투 쓴 거다. 전두환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마자 잘렸다. 이 홍순두의 아들이 권노갑씨의 딸과 결혼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 홍순두는 항공업계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규동의 세째 딸 이정순은 김상구와 결혼하였다. 육사 15기 출신이자 전두환이 이끈 하나회 멤버이기도 하다. 김상구는 윤필용 사건이 터진 1973년 중령으로 예편하고, 미국으로 이민가 한국일보 하와이지사장을 지냈다.

5공화국 출범과 함께 귀국해 평통 사무차장, 호주대사 등을 역임하고 12, 14대 때 두 차례 금배지를 달았다. 호주 대사 시절 공관장회의가 열리면 외무부의 귀빈용 승용차를 타고 다니거나 직업외교관이나 군 출신 선배 외교관을 호령했던 일화는 당시 외무부 안에서 씁쓸한 일들로 회자되었다.

이규동의 아들 이창석은 현재 삼원코리아 대표이사다. 삼원코리아는 외국 오디오 수입업체다. 이창석 또한 공금 횡령과 세금 포탈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조카인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이 결혼할 때 축의금을 5000만원이나 냈다. 이규동은 1억 7천만원이나 냈다. 헐..

이창석은 아버지 이규동에게 경기도 화성시 땅 26만평을 증여받으면서 탈세를 하기도 하였다.

이규동의 동생 이규광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최대의 어음부도 사기사건을 일으킨 장영자가 이규광의 처제다. 그런데 희안한게 이규광의 장인과 김대중 전대통령의 세상을 떠난 전부인인 차용애여사의 어머니, 그러니까 김대중 전대통령의 장모가 남매지간이다.

이규동의 또 다른 동생 이규승도 군출신으로서 역시 은행부채 유예관련 뇌물을 먹고 징역을 살았다.

전두환은 형제가 무지하게 많다. 그 가운데 전기환과 전경환이 특히 설쳐댔다.

전두환의 형 전기환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순경으로 있다가 시골에서 돼지를 치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12,12 쿠데타가 성공한 즉시 농사를 짓던 전기환은 서울로 올라온다. 동생 두환이가 서초구 반포동에 대형 아파트를 사줬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이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결국 전두환이 물러난 후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으로 징역을 살았다.

유도대학을 나온 동생 전경환도 전두환 덕에 새마을운동본부 기금 73억여원 횡령하고 여러 이권에서 알선수재를 하고 10억6,000만원을 탈세하는 등 8개 혐의로 훗날 구속되었다.


△ 전경환 ⓒ 엠파스 검색

전경환의 동서인 황흥식과 김승웅도 너도 나도 해 처먹는 통에 끼어 들었다가 구속되었다.

전두환의 작은 아버지 전상기의 둘째 아들, 그러니까 전두환의 사촌 전순환도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수뢰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전두환의 또 다른 작은 아버지 전상희의 큰 아들, 그러니까 전두환의 사촌 전우환도 고향인 합천 시골에서 조그맣게 정미소를 운영하다가 느닷없이 양곡가공협회 회장이 되었다. 새서울 용역 감사, 각종 인허가 청탁에 개입하여 수뢰를 한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전두환의 누나 전학렬의 아들, 그러니까 전두환의 조카도 온갖 청탁에 개입하고 수뢰를 한 혐의로 감옥으로 향했다.

그 외에도 전씨들의 약진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심지어 전두환과 단지 성만 같은 멀고 먼 일가친척인 전씨들이 숱하게 성공가도를 달린 사례가 있다.

한마디로 가장 원시적인 네포티즘으로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게 부족사회냐, 씨족사회냐?? 이러고도 민주공화국이라고 말할 수 있나?

어쨌든 이런 전두환에게는 3남 1녀가 있다.

큰 아들 전재국은 시공사 대표로서 대한민국 출판문화업계를 주름잡는 사람이다. 케이벤치라는 회사까지 인수해서 요즘엔 IT 미디어 시장을 넘보고 있다. 이 자가 얼마 전에 "청와대 7년 산 업보가 너무 가혹하다"고 말해서 민주개혁세력을 아연 실색케 했다.

지금 단지 청와대에 7년 살았다는 이유로 전두환과 그 수족들이 비난받는 것인가?

그 아비 전두환은 2205억원의 추징금 가운데 불과 314억원만 납부했다. 전액을 납부해도 시원치 않을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자다. 그런데 얼마 전 전재산이 29만원이라고 국민을 우롱했다.

그러면서 그 장남인 전재국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출판업체인 시공사의 대표로 있고, 강남에 엄청난 땅이 있는데다가 그 손자, 손녀들에게도 수 십억 원의 재산이 있다. 전재국은 얼마 전 연천에 1만 6천평을 땅을 사서 큰 차익을 얻기도 했다.

이런데도 단지 청와대에 7년 살았다는 이유로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 전재국 ⓒ 엠파스 검색

전재국은 얼마 전 음주운전을 하다가 벌금 200만원에 약식 기소됐다.

전두환의 큰 딸 전효선은 한국투자신탁 사장 윤광순의 아들인 윤상현과 결혼하였다. 전두환의 사위 윤상현은 변호사로서 한양대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이 자는 지난 17대 총선 때 인천 남구에서 한나라당 간판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민주개혁세력이 정치권 진입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할 인물이다.

전두환의 둘째 아들 전재용은 포항제철 명예회장 박태준의 막내딸 박경아와 결혼했다. 사실 이것은 심각한 것이다. 박태준 집안은 강원산업으로 연결이 되고 강원산업은 두산이나 현대자동차로 연결이 된다. 또 그 유명한 삼양통상 허씨 집안으로 연결이 된다.

그러나 전재용은 박경아와 이혼하고 공무원을 지낸 최성대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했다.

현재 전두환이 재벌과 끈이 닿는 것은 한남동에 100억원대 빌딩이 있는 막내아들 전재만이 유일하다.

전재만은 한국제분 회장 이희상의 딸 71년생 이윤혜와 결혼했다. 이윤혜의 여동생 이유경은 신동방그룹 회장 신명수의 동생 신영수의 아들 신기철과 결혼했다.

문제는 전두환의 며느리 이윤혜의 막내여동생 이미경이다. 이미경은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의 큰 아들 조현준과 결혼했다. 알다시피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의 동서가 동자부 장관을 지낸 이봉서이고 이봉서의 사돈이 한나라당의 이회창이다.

그러니까 전두환의 아들 전재만은 효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과 동서지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골 때리는게 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이 조현준의 동생 조현문의 부인 이여진이 지금 대통령 비서실에서 노무현대통령 영어통역을 담당하고 있다. 이거 보안이 유지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대통령 비서실은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

노무현대통령과 부시대통령 사이의 대화를 남편에게 얘기하면 남편이 형에게 얘기하고 형이 동서인 전재만에게 얘기하면 전재만이 처남인 윤상현에게 얘기하고, 윤상현이 그대로 자신의 소속정당인 한나라당에 보고한다면???? 전두환은 살아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더 골 때리는 것은 전두환의 아들 전재만의 동서인 조현준의 작은 아버지가 한국 타이어 회장 조양래인데 이 조양래의 아들 조현범이 이명박의 딸 이수연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재만의 동서 조현준의 사촌동생 조현범의 장인이 이명박이라는 말이다.

노무현대통령의 영어통역을 담당하는 사람의 남편 사촌동생의 장인어른이 이명박이라는 말이다. 이거 말이 되나??

<이회창 - 전두환 - 이명박>은 굳건하게 손을 잡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알다시피 이명박의 형 이상득도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이상득의 큰 딸 이성은은 LG벤처투자 회장 구자두의 아들 구본천과 결혼했다.

이상득의 사돈 구자두는 구인회의 네째 아들로써 구자두의 큰 형이 LG 명예회장 구자경이다. 구자두의 세째 형수가 삼성그룹 이병철회장의 딸 이숙희다. 구자두의 바로 밑의 여동생 구자혜가 대림그룹 창업자 이규덕의 아들 이재연과 결혼했다.

어,,, 골치아프다. 이쯤해두자... 어쨌든 살인마 전..두..환.. 은.. 살..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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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가문 (제 8 편) - 노태우家


 
한국의 명문가문은 2005년 9월에 피투성이님이 서프라이즈에 연재한 12편의 대한민국 명문가문들에 대한 글이다.

처제의 결혼식 때문에 며칠 간 전라남도 땅끝 처가댁을 다녀왔다. 농민들의 시름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구조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내일 모레 예순인 우리 장인어른이 청년 소리를 듣는 농촌을 향해 비교우위론만 외쳐대기엔 상황이 너무 절박하다. 농사가 아니고서야 농민들이 어디에서 생활비를 조달하나? 돈 나올 구석이라고는 농사밖에 없다.

농민들이 편안하고 행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선진국이라고 할 수가 없다. 새벽 여섯시에 일 나가서 해가 저물도록 허리가 휠 만큼 일하고서 얻는 결과를 보면 참으로 가혹하다.

어쨌든 호남 지역을 순방(?)하느라고 한국의 명문가문 시리즈가 늦어졌다. 오늘은 어떤 명문가문을 후벼파볼까??


오늘은 군사반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직대통령 노태우 가문에 대해서 알아보자. 

흔히 전두환, 노태우 패거리를 우리는 전노일당이라고 부른다. 이 전노일당이 한 짓은 다 거기서 거기다. 전두환 편에서 한번 정리했다시피 한마디로 다 "찢어 죽일 놈"들이다.

인두껍을 쓰고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서슴지 않고 했다. 전두환, 노태우 일당의 정치적, 법적, 역사적 처단을 다시 요구한다.


특히 이 노태우는 초급장교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띠는 전두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지닌 육사 동기생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역할을 하면서 전두환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하게 된 자다.

전두환이 철면피한 군사반란을 일으키는데 전방 9사단 병력을 빼내어 협력하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2인자로 떠오르게 된다.


그 후 피바다 공화국인 전두환 통치 아래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국민을 철저히 기만하는데 성공하여 직선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보통사람이라고 속이고, 수천억 원의 뇌물을 받고, 나랏돈을 도둑질하였다.

대통령이라는 권좌를 이용하여, SK그룹, 신동방그룹과 사돈을 맺으며 실리를 엄청나게 챙기고 지금도 테니스 구경이나 다니며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다. 아직도 얼굴에 기름끼가 잘잘 흐른다.

이런 자가 전직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여태까지 무궁화대훈장을 보유하고 있다니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인가?  이미 97년 내란죄로 무기징역형 선고를 받았으므로 전직대통령이 아니라 이제는 군사반란의 수괴다.

열린우리당이 나서서 당장 상훈을 치탈해야 한다. 어쨌든 지금 그런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다행이다. 누군가 5.18 광주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는 표현 자체가 상투적이라고 하던데 현실 자체가 상투적이다.

전두환, 노태우가 무슨 전직대통령이냐??  언론에서도 전두환, 노태우는 전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야한다.

5월 광주가 민주화운동이라면 그 민주화운동을 피바람을 일으키며 진압한 새끼들은 도대체 뭐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전직대통령 운운하면서 대우해주는 것 자체가 국민들 사이에 가치관 혼돈을 일으킬 만한 빌미를 주는 거 아닌가?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꼬박꼬박 존칭 써주면서 높여줄 이유가 어디 있나?

우리가 앞으로 한 단계 높은 선진정치문화를 만들어나가자면 별 수 없이 한나라당과 상생을 해야 하고,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하겠지만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별개다.

이미 법원에서 내란을 일으킨 반란군의 수괴로 판명난 부정부패의 화신들 아닌가?  적대적 대결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일단 역사를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우리가 역사를 왜 공부하는가?  역사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 위해서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는 거다.

불과 20년 전의 엄청난 국가적, 역사적 범죄를 저지른 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물타기를 대신 해주거나 감정에 치우쳐서 면죄부를 주는 식의 역사인식으로는 올바른 미래로 나아갈 수가 없다.

한나라당이 진정 공당이라면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이 역사적 부채를 스스로 정리하고, 독재의 유산을 스스로 청산해서 이제는 역사의 한 단계를 넘어서는 그런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나라를 지켜야 할 현역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하고, 이에 저항하는 양민들에게 무자비한 총질을 가한 것을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렇게 탈취한 정권으로 사돈의 팔촌까지 나서서 도둑질에 열을 올리고 부정부패를 일삼은 것은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 노태우와 전두환
ⓒ2005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금의 한나라당과 이제 별 상관이 없고, 이미 선거로서 국민적 심판을 받았다고 강변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그게 상식적으로 한나라당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을 전 국민이 알고 있고, 현재도 그 당시의 실력자들, 관료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지금 상황에서는 한국 정치의 비생산적인 대결구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을 모종의 도덕적 결단이 필요한 것 아닌가?

사람 죽이고, 도둑질하고, 뇌물 처먹고, 거짓말하고, 전기고문하고... 이런 것은 나쁜 짓이다. 나쁜 짓을 나쁘다고 하는 것은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그냥 인간의 도리다. 한나라당에게 인간의 도리를 촉구한다. 그래야 한국정치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과거를 붙잡고, 과거에 얽매여서, 과거에 발목 잡혀, 과거를 변명하는 제 1야당이 존재하는 한국 정치는 불행하다. 깨끗하게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털어내고 진정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지도자의 용기다. 한나라당에 그런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정말 없단 말인가?  그런 참다운 용기를 발휘할 때 한국정치의 신기원이 열린다.

모든 한나라당의 구성원들이 과거를 변명하고, 과거를 감추는 것으로 일관해도 한나라당의 단 한명의 올바른 지도자가 나서서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결단한다면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럴려면 우선 사람 죽이고, 도둑질하고, 뇌물 처먹고, 거짓말하고, 전기고문했던 과거의 인맥부터 멀리해야 할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오늘의 주인공인 노태우 집안에 대해 알아보자.

노태우의 부인은 김옥숙이다. 노태우의 친가 쪽은 그다지 볼 게 없지만 처가 쪽은 노태우가 아니더라도 자생력을 갖추고 있는 괜찮은 집안이다. 노태우가 처가 덕을 꽤 본 것이 사실인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김옥숙은 촌스러운 이름과는 달리 좀 럭셔리하다. 직접 디자이너를 불러 청와대의 식기를 까다롭게 호화스런 이미지로 바꾼 것도 김옥숙일 정도다.


김옥숙의 오빠가 김복동이다. 김복동은 노태우와 더불어 육사 11기로서 경북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노태우와 김옥숙을 맺어준 인물이다. 김복동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전두환과 더불어 육사 11기의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육사 11기 생도대장을 맡기도 했다.


김옥숙의 오빠 김복동은 상당히 의연한 군인상을 보여주었다. 전두환이 군사반란을 일으키자고 회유하자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오직 군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하자는 약속을 잊었느냐”며 거절했다. 김복동이 노태우의 처남이긴 하지만 이 대목은 참 가슴이 뭉클하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5공 출범이후에 군복을 벗었다. 잠시 낭인으로 떠돌다가 광업진흥공사 사장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권토중래를 꿈꾸다가 정치권에 진입, 한 때 김복동 대망론이 회자될 정도로 권력의 핵심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거물 김영삼을 만나 김복동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결국 정치권에서 축출 당한다.

김복동의 둘째 딸 김미경은 김한수 한일그룹 창업자의 다섯째 아들 김중명과 결혼하였다.


김복동의 사위 김중명의 큰 매형은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이재우다. 김중명의 작은 아버지 김택수는 박정희가 만든 공화당에서 원내총무를 지낼만큼 유력한 정치인이었다. 김택수의 둘째 아들, 그러니까 김복동 사위의 사촌형인 국민생명보험 부회장을 지낸 김중민이 LG창업고문 구두회의 딸 구은정과 결혼하였다. 구두회는 LG창업자 구인회의 막내동생이다.

김복동은 아들이 없고 딸만 네 명이 있는데 이 가운데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딸 하나가 증권업협회장을 지낸 강성진의 아들 강흥구와 결혼하였다. 이 김복동의 사위 강흥구의 여동생 강신애가 두산그룹 부회장인 박용만과 결혼하였다. 박용만은 두산의 실질적인 창업자 박두병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김복동은 한일그룹과 두산그룹, LG그룹과 연결되어 있다.

△ 박철언 ⓒ 엠파스 검색
김옥숙의 친인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또한 박철언이다. 경북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였다. 사시 8회다.

내가 보기에 박철언은 권력지향형 검사였다.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을 위해 땀을 흘렸다. 국보위 사법분과 위원이었다. 그 후 승승장구했다. 특히 6공의 황태자라고 불렸다.


노태우의 부인 김옥숙의 고모, 즉 노태우의 장인 김영한의 여동생 김당한의 아들, 즉 고종사촌 동생이다. 꽤 호가호위했다. 정무 제 1 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지냈다.


거물 김영삼에게 맞서다가 정치생명이 끊어졌다. 요즘 마치 자신이 무슨 의로운 일을 한 것처럼 큰소리 뻥뻥치면서 회고록을 내고 있지만, 알고 보면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다가 축출당한 정치검사 출신에 불과하다.


부인 현경자가 비리로 감옥에 간 남편 박철언을 대신해서 대구에 출마하여 금배지를 달기도 했다. 이것은 정치 후진국에나 있을 법한 일임에 틀림없다. 박철언의 딸 박지영은 청주지방법원 판사인 이상원과 결혼하였다.  

또 하나의 김옥숙의 주요 친인척으로는 금진호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금진호의 또 다른 별명은 경제대통령이다. 대구 대륜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은행원으로 있던 금진호는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한 김옥숙의 여동생 김정숙과 결혼하였다. 상공부 국장 등을 지내다가 전두환의 군사쿠데타가 성공하자 승승장구, 국보위 상공분과 위원장으로 나서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후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정치권에 입성, 5공의 금융대통령 이원조와 더불어 92년 대선자금 마련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달 금진호의 아들이자 김옥숙의 조카인 금한태가 한큐에 증권투자로 73억 원을 벌어들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젊은 나이에 증권으로만 재산이 300억 원이다.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도 한방에 100억 원의 대박을 쳤다. 


김옥숙의 큰 오빠 김진동은 대구 종로학원장으로 학원계를 주름잡았다.


김옥숙의 작은 오빠 김익동은 경북대 보건대학원장과 경북대 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경북대 명예교수다. 김익동의 부인 김경숙도 영남대 의대 교수 출신이다.

미국에서 변호사노릇을 한다는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은 신명수 신동방그룹 회장 딸 신정화와 결혼하였다.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의 장인 신명수는 1941년 부산 출신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신동방 창업자 신덕균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영자다. 김영자의 남동생이 알만한 사람은 아는 김종대다. 김종대의 사돈이 그 악명높은 김치열이다. 김종대의 딸은 조욱래와 결혼하였다.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의 동생이다.

신명수는 노태우의 비자금 관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으로 돈을 빼돌리고 주가조작을 한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국가는 이 신명수를 상대로 230억원의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판결을 받았다.


노태우의 사돈인 신명수의 동생 신영수는 서울대 의대 교수다. 신영수의 장인은  일본제국주의 시절 조선은행 관리로 출발하여 재무부장관을 역임한 천병규다. 이 신영수의 아들 신기철이 한국제분 이희상의 딸 이유경과 결혼하였다. 이 이유경의 형부가 전두환의 아들 전재만이다. 으악!!!!! 


또한 이유경은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장남 조현준의 처형이기도 하다. 이유경의 여동생인 이미경의 남편 조현준의 작은 아버지가 조욱래다. 조욱래의 딸 조윤경은 신라컨트리클럽 홍준기의 아들인 코코젠 사장 홍석융과 결혼하였다.


이 홍석융의 동생 홍지연이 권노갑의 아들 권태민과 결혼하였다. 권노갑의 딸 권수현이 이순자의 동생 이신자의 며느리가 됐으니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이유경의 여동생인 이미경의 남편 조현준의 또 다른 작은 아버지인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도 만만치 않다. 서울시장 이명박과 사돈이니까.


다 알다시피 노태우의 딸인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맡고 있는 경희대 겸임교수 노소영도 당대 최고의 재벌 2세인 SK그룹 회장 최태원과 결혼하였다.


물태우가 물태우가 아님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실리에 이보다 더 강할 수는 없다. 섬유와 화학을 하던 SK가 느닷없이 이동통신 사업자가 된 배경???  그게 참 궁금하다. 그걸로 지금도 떼돈을 긁고 있다. 전국의 모든 국민이 핸드폰 하나씩 들고 톡톡 거릴 때마다 노태우의 사위가 돈방석에 앉는다. 헐...  난 그래서 지금도 핸드폰을 안 쓰고 공중전화를 이용한다. 배 아파서..


노태우의 사위인 최태원의 작은 아버지 최종관은 그 유명한 한양대학교 이사장 김연준과 사돈이다. 게다가 최종관은 한 때 끗발 좀 날렸던 나웅배 경제부총리와 사돈이다.


나웅배는 민주개혁세력이 유심히 관찰을 해 볼 인물이다. 나웅배의 동생 나중배는 육사 15기 하나회 출신으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내고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여 사우디 대사를 거쳤다. 나중배는 요즘도 무슨 원로 시국선언 같은 곳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며 노무현 정부를 압박하는데 앞장선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태원의 작은 아버지의 사돈인 나웅배의 조카가 수원지방검찰청 검사 이문한이다. 이문한의 아버지가 전두환 비자금 사건 때 변호인으로 활약했던 이진강이다.


이진강의 형이 바로 육사 15기 하나회 핵심멤버인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진삼이다. 이진삼의 딸 이운한이 현재 대검찰청 혁신추진단장인 조근호 검사와 결혼했다. 이 조근호 검사가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 비서관을 지냈다. 뭔가 좀 이상하지??  검찰의 혁신을 하나회 핵심멤버의 사위가 담당한다??


게다가 나웅배의 매제 박정기는 육사 14기 하나회 출신으로서 윤필용 사건으로 군복을 벗고 훗날 한국전력 사장을 맡았는데 그의 사위가 서울지검 형사부장을 거쳐 인천지검 차장검사에 있는 한상대다. 한상대의 부친이 변호사 한윤수다.

이렇듯 노태우의 인맥은 무서우리만큼 대한민국 상층부에 거미줄처럼 뻗어있다. 이것도 피상적으로 살펴본 것일 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구지뢰밭을 파헤치다보면 오늘 잠 못 잘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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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가문 (제 9 편) - 박정희家


 
한국의 명문가문은 2005년 9월에 피투성이님이 서프라이즈에 연재한 12편의 대한민국 명문가문들에 대한 글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칡넝쿨처럼, 고구마 줄기처럼,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있는 대한민국 명문가문(?)의 인맥에 대해 사정없이 후벼 파 보자.

오늘은 "박정희가"다.

△ 박정희 전 대통령 ⓒ 네이버 검색

대한민국을 19년간 떡 주무르듯이 가지고 놀고, 동서남북 찢어서 국민들 가슴에 상처를 주고, 수 많은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던 그 악명 높은 박정희 가문에 대해 알아보자.

한마디로 박정희는 멋대로 마음대로 한 세상 풍미하면서 즐길 거 다 즐기고 해 볼 거 다 해보고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이다.

물론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요즘도 내이션 빌딩 운운하며 그의 경제개발 업적을 지나치게 과대하면서 불가피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럴 때 늘 인용하는 글이 있다. 좋지도 않은 머리로 귀찮게 한두 명도 아닌 그런 사람들이 억지논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일일이 대꾸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것보다 그냥 이런 논문들을 사안별로 딱 정리해놓고 있다가 필요할 때 긁어 붙이면 게임 끝이다.

<연 10% 안팎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모두 박정희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 값싼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고, 집권 초창기 방위비 부담이 크지 않았으며, 1960~80년대에 걸쳐 미국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린 데 따라 반사이익을 볼 수 있었다는 객관적인 여건을 감안해야 한다.

박정희가 잘해서 경제가 잘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지도자의 역량과 국민의 역량을 혼동하는 것이다. 국민의 역량과 시대적 요구에 의해 지도자의 역량이 발휘된 것으로 봐야 한다. 흔히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예를 들어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만, 한국은 필리핀과 달리 우수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좋은 바탕을 깔고 있었다. 여기에 국제적인 역학 구도로 중동 특수를 누릴 수 있었고,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는 데 유리했다는 외부 여건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1960, 70년대에 한국이 이룬 경제적 성과에서 박정희의 공은 제한적이다.

박정희 정권 경제정책의 상징인 ‘경제개발계획’이 실상 5·16 쿠데타 이전인 2공화국 시절에 세워졌다는 점도 박정희 개인의 공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대목이다.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이를 추진할 경제기획원 설립 구상도 2공화국 때 이미 마련돼 있었다.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은 박정희 시대의 경이적인 양적 성장은 정경유착, 각 부문의 불균형 성장, 관치금융 등 어두운 구석을 배경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60, 70년대의 경제적 성과에서 차지하는 박 전 대통령의 기여도와 함께 또 하나의 커다란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양적 성장이 세계 경제사적으로도 괄목할 만했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을 고려하면 총점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독재를 했지만, 그래도 경제는 잘하지 않았느냐’식의 ‘박정희 신화’는 설 땅을 잃게 된다.

문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 총점’을 똑 떨어지게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를 바라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크기가 확연하게 달리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순전히 경제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경제 철학과 가치관의 문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적 사안이어서 경제 총점은 제각각 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박정희 신화의 실체는 "지도자의 역량과 대중의 역량을 혼동한 결과"라는 말이다. 또 시운까지 딱 들어맞았던 것이 주효한 것이다.

서프앙들이라면 전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말이므로 더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다.

다카키 마사오 시절 얘기 제쳐두고, 또한 여순사건 당시의 왔다리갔다리 행각 빼놓더라도, 박정권 19년만을 두고 평가해도 박정희의 죄악은 천지를 뒤덮고도 남을 양이다.

박정희 정권 전반기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후반기엔 긴급조치로 사람들을 조졌다. 물론 긴급조치 시절에도 급하면 국가보안법, 반공법의 미친 칼춤을 추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그래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인혁당 사건이다. 취약한 군사독재정권의 한계를 감추기 위해서, 저항하는 민주화세력을 빨간색으로 채색시켜 국가전복을 기도하는 폭력집단으로 조작하여 일관되게 사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나이 서른도 안 되어 잔혹하게 파멸당한 여정남씨 얘기는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얼마나 고문을 많이 당했던지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고 한다. 사형을 선고하자 마자 가족에서 알리지도 않은 채 급하게 사형을 집행하고, 처형 후에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하지도 않고 서둘러 화장해 버렸다.

석방시켜 주거나 면회시켜 주거나 시신을 인도하면 그 잔학상이 드러나 정권이 파멸될 거 같으니까.

이런 개씹탱구리같은 새끼들이 어디 있나?? 이렇게 죽인 사람이 자그마치 여덟 명.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이 9명, 징역 12년 이상 선고받은 사람이 20명.

울화통 치민다. 그 딸은 그 죄악이나 빌 것이지 무슨 또 대통령을 하겠다고 설쳐대질 않나, 그 사법살인의 정점에 있던 자의 사위가 대한민국 최고 귀족에, 거대 족벌 언론사 사장이라니....

나라꼴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박정희가 이데올로기 사슬로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억울하게 몰아가지고 남의 인생 조지고, 그 집안 풍비박산 시킨 경우가 어디 한 둘인가?

박정희정권은 국가테러리즘의 전형이었다. 제일 웃긴 것은 박정희가 스스로 깡패보다 더한 짓을 했으면서 깡패소탕 운운한 것이다. 기가 차다.

박정희가 깡패들을 잡아서 바람직한 인간으로 선도하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재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준게 아니라 무식하게 군사적 규율을 살인적인 폭력으로 강요하면서 철저하게 인권을 유린했다. 깡패보다도 못한 국가적 폭력을 자행했다.

그래서 새사람 만들었나? 이후 또 다시 깡패조직을 권력의 말단 행동대원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는가? 자신들이 필요할 때는 깡패를 써 먹고, 깡패짓 해도 되고, 사회적 공포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국민재건 운운하면서 끌고 가서 마구 부려먹고 마구 때린 거 아닌가?

전두환이도 나중에 그거 흉내 내면서 사회정화를 떠벌린 거 아닌가?

대가리에 들어있는 군국주의의 잔재가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지금도 "그게 사나이답다"면서 침 질질 흘리는 사람들은 뭐야? 침 닦아!!! 전사모, 뭐야?? 박사모, 누구야??

그 군홧발 아래 억울하게 희생당했을 힘없고 가엾은 약자들의 고통은 왜 안 보나?

유신체제 7년동안 국가보안법, 반공법, 긴급조치 위반으로 엮어서 감옥으로 끌고 간 청년 학생만 무려 1197명, 노동자 농민 275명, 성직자, 종교인 132명, 언론인 문인 84명, 선생님 52명, 정치인 70명, 기타 등등 1000명..........

유신체제 하 양심수 총 2704명.

△ 김지하 시인 ⓒ 네이버 검색




김지하 시인이 당시 이렇게 말했다.

"반공법 제4조의 상투적, 견강부회적, 무차별적, 모략적 적응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사상적, 정신적 성장과 발전을 빼앗아 온 최대의 질곡이며 우리 민중으로부터 '말의 자유'를 빼앗아 숨막히는 암흑과 침묵의 문화를 보급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부패특권의 압제권력을 유지해 온 최대의 억압의 무기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자유의 이름으로 머리 끝부터 발끝가지 치떨리는 분노로 항의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개성의 허용,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온몸으로 요구한다. "

그야말로 박정희정권은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인권유린의 구조화를 자행하여 한국사회 전체를 군사문화가 지배하는, 반민주적 독소로 가득찬 사회로 만든 원흉이다.

박정희 덕분에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국가기관들이 전부 인권유린의 도구로 전락하였고, 아직도 그 때문에 국민적 신뢰를 되찾지 못해서 고충을 겪는 것이다.

극악한 고문도 성행하였다. 물고문, 전기고문, 수면방해, 구타, 천장에 거꾸로 매달기,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넣어 비틀기, 겨울에 옷을 벗기고 찬물에 집어 넣기, 불이나 담배불로 지지기, 비녀꽂기, 통닭구이, 강간.윤간.기타 성고문, 물 속에 머리 처박기, 고춧가루물을 코에 붓기, 원산폭격, 빈대붙기, 칠성판에 묶고 구타하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박사모?? 박정희의 전면적 이데올로기 공세에 흡수된 거냐? 살인적인 인권탄압의 실상을 모르는 거냐? 망각의 해악인가? 민주주의가 그렇게 불만인가? 뭐야,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조용수 사장은 왜 죽었고, 황태성 사건의 진실은 무엇이고, 동백림 사건, 남민전 사건은 뭐야? 멧돼지는 어디로 갔나?

젊은 사람들이 왜 멀쩡히 있다가 감옥에서 옥사를 그렇게 많이 했는지 생각해 봐라.

영화 "실미도" 못 봤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무슨 부정선거 고발했다고 열차에서 떠밀어서 죽이지 않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운동하는 선교사에게 독약을 먹이질 않나, 대학교수를 잡아다가 창밖으로 집어 던지질 않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억울하게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결정된 사안만 보더라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박근혜가 저렇게 정치판에서 설쳐댈 수가 없는 거다.

이건 악마 중에도 대마왕이다, 대마왕. 베엘제불.... 악마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박정희 향수라는 것은 결국 자기 가치파괴로 귀결될 게 뻔하다.

박근혜라는 여인도 불쌍한 여인이다. 박근혜 정도되는 사람이 이런 사건들의 진실에 대해 전혀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부친이 저지른 죄업을 모른 척 하면서, 또는 두둔하면서 그 죄를 씻기 위해 용서를 빌기는커녕 가해자 편에 서서 또 다시 민주세력에게 상처를 가하고 있는데 이 또한 불행한 자기 가치파괴로 결론이 날 것 같다. 그러니까 박근혜도 박정희에 의해 빚어진 또 하나의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박정희는 불법적인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후, 탈취한 권력을 악용해 끊임없이 추악하게 정권 연장을 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최고권좌에 앉아 있었다.

물론 그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가문도 엄청나게 번성시켰다.

무슨 박정희가 검소하고, 역대 가장 청렴한 대통령이고, 친인척을 멀리했다는 소리들을 그렇게 하는데 다 좆까는 소리다. 죽을 때까지 이 나라에서 천황으로 살았는데 무슨 소리하는 건가? 정수장학회 얘기는 듣지도 못했나?

그 문란했던 사생활을 보고도 검소하고 청렴하다는 얘기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나? 친인척을 멀리하기는 뭘 멀리해? 쓸 수 있는 사람은 다 끌어다 한 자리씩 줬다.

당시 박정희 친인척비리가 불가사의하게도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를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있어도 잡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는 걸 몰라??

우선 박정희의 딸 박재옥부터 알아보자. 사람들이 박근혜가 큰 딸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박재옥이다. 박재옥은 박정희의 첫째 부인 김호남이 낳은 딸이다. 박재옥은 한병기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한병기는 1931년 평남 안주 출신이다. 홍익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을 하자마자 불과 30살의 나이에 별 경력도 없이 주뉴욕총영사관 영사가 되었다. 35살의 나이에 건설공제조합 이사장이 되기도 했다. 선주협회 회장을 지내고 박정희 시절 설악관광케이블카 회장이 되어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유엔대사, 캐나다대사를 역임하기도 하고, 공화당 총재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박정희가 죽자마자 권력에서 멀어졌다. DJP연대로 사촌 동서인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득세하자, 방송개혁위원회 위원, 국무총리 자문위원장이 되는 등, 조금 고개를 들었다.

이래도 박정희가 친인척을 멀리한 건가?

그 다음에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아들 박재홍을 보자. 그러니까 박정희는 박재홍의 작은 아버지다.

1941년 경북 구미 출신이다. 대구상고, 고려법대를 졸업하였다.

28살의 나이에 포항제철 행정실장이 됐고 32살의 나이에 동양철관 회장이 되었다. 이거 정상적인 건가??

민정당, 민자당에서 국회의원을 4번씩이나 해 먹었다. 그 후 자민련으로 갔다가 다시 한나라당으로 갔다가 국민회의로 건너오는 등 이상한 정치행각을 보여주었다.

또 박정희의 또 다른 형 박상희의 아들 박준홍을 보자.

1947년생이다. 경북 구미 출신이다. 계성고, 경희대 정외과,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였다. 김종필의 부인 박영옥이 박준홍의 누나다.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급 관리관 정무조정실장이 되었다. 요거 요즘같은 대명천지에 가능한 얘긴가? 그러더니 32살 때 그 막강한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었다.

박정희 사망으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방황하다가 매형 김종필이 만든 자민련에 들어가서 지금도 자민련 경북 구미갑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촌형인 박재홍과 맞붙기도 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박정희의 친인척 가운데 쓸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 썼을 뿐이지 쓸만한 사람은 다 갖다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의 오빠, 그러니까 박근혜의 외삼촌인 육인수 같은 경우에도 학교 교사로 있다가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에 승승장구하면서 5선 의원 씩이나 지낸 거 아닌가?

그 육인수의 사위 이석훈은 청주 MBC 사장을 지내고, 충청일보 사장을 거쳐서 현재 일신산업 회장이다.

김종필 같은 경우에도 박정희가 끔찍이 생각했던 형 박상희의 딸인 박영옥의 남편 아닌가? 박정희의 처조카 김종필이 이후락 등과 함께 80년 신군부에 의해서 부정축재한 재산이 환수조치됐는데 그 총 규모가 887억원이다. 25년 전에 887억원이면... 이건 계산이 불가능한 돈이다.

이래도 박정희가 깨끗하고 청렴한가? 그걸 몰라서 가만히 놔 둔 건가? 박정희 개인은 절대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축재할 필요가 없었을런지는 모르겠다.

박정희 덕이 아니라면 박근혜가 어떻게 정수장학회를 지배하고 있나? 정수장학회가 말이 장학회지, 그 규모가 1조 300억원에 이른다. MBC의 30%가 정수장학회 소유다. 부산일보도... 경향신문 사옥 부지도...


△ 육영재단 박서영 이사장 ⓒ 네이버 검색


박정희의 또 다른 딸 박근영(박서영으로 개명)은 또 어떻게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나? 육영재단도 수천 억원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무슨 수로 코스닥에서 한방에 46억원 짜리 대박을 치나?

이게 청렴한 대통령의 표상이라는 박정희의 모습이다.

게다가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다던 박정희의 형 박동희의 딸 박재선을 의사와 결혼시키고, 형 박상희의 둘째 딸 박계옥의 남편 김용태를 그 막강한 대통령 경호실에서 근무하도록 했다.

그 뿐이랴!!!!

박상희의 세째 딸 박금자를 총리실에서 근무하는 반기언과 혼인시키고, 결정적으로는 박상희의 막내 딸 박설자를 벽산그룹 창업자 김인득의 아들인 김희용과 결혼시켰다. 김희용은 현재 벽산계열인 동양물산기업 대표이사 회장이다.

이 박설자로 말미암아 박정희 집안이 드디어 그랜드 서클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박정희의 조카 박설자의 남편 김희용의 형 김희철이 현재 벽산그룹 회장이다.

김희철의 부인, 그러니까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가 바로 LG그룹의 한 축인 삼양통상의 창업자 허정구의 딸 허영자다. 이 허영자의 조카사위, 그러니까 허영자의 남동생의 사위가 바로 조선일보 후계자로 알려진 방준오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한번 가보자. 참 웃기는 거 발견했다. 박정희 조카 박설자의 동서인 허영자의 오빠가 현재 삼양통상 회장인 허남각이다.

이 허남각의 딸 허정윤이 얼마 전에 정대호라는 청년과 결혼을 했는데 이 정대호가 그 유명한 황해도 재령의 대지주의 아들인 강원산업 창업자 정인욱의 손자이자, 현재 강원산업 회장인 정문원의 아들이다.

이 정문원의 부인 최금자의 언니가 최금숙이다. 최금숙이 누구냐? 바로 얼마 전에 형제의 난으로 물러난 두산그룹 회장 박용오의 부인이다.

게다가 정문원의 동생이 정도원인데 정도원에게 두 딸이 있다.

큰 딸 지선이는 기아자동자 회장인 정의선과 결혼했다. 정의선은 누구냐? 현대자동차 정몽구의 회장의 외아들이자 정주영회장의 손자다, 이 말이다.

작은 딸 지윤이는 박성빈이라는 청년과 결혼했다. 이 박성빈은 또 누구냐? 포항제철 박태준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포철 박성빈이랑 현대 정의선이랑 동서가 된다. 따라서 현대그룹이 철강산업을 하려고 부지까지 선정하러 다니다가 포기한 배경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 박성빈을 좀 파헤쳐보면 아주 재밌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서프앙들에게 미안해진다. 양해 바란다.

박성빈은 미국 실리콘 밸리에 있다가 요즘 무슨 통신 솔루션 업체인 사운드파이프 코리아 대표이사로 있다.

이 회사를 가만히 보니까 무슨 다국적 기업인 것 같은데 국내 대리점을 영업하는 듯 하다. 전자신문같은 걸 보면 꽤 잘 나가는 듯 하다. 잘 나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사운드파이프에서 무선랜 환경을 구축했다는 아산병원은 현대 계열 아닌가??

박성빈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 박태준이 국무총리직에 있을 때 드러난 박성빈의 부동산만도 강남구 역삼동의 170평짜리 카센터와 강남구 신사동의 빌딩 등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한남동에 빌라도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고구마 줄기라고 할 수 없다.

박성빈의 매형 김형수를 주목해야 한다. 김형수는 박태준의 한국화가 딸 박유아와 결혼을 했는데, 박유아는 본래 변호사 고승덕과 살다가 헤어졌다.

이 김형수는 또 이력이 만만치 않다. 한국맥도널드 사장과 국내에서 일본 도요다 자동차 렉서스를 수입판매하는 렉서스 케이모터스 대표이사다.

그런데 이 김형수의 부친이 그 유명한 동일고무벨트 창업자인 김도근이다. 이 김도근의 이력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치지향적인 것이 분명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등등 골 때리는 이력이 꽤 많다.

문제는 김도근의 큰 아들이자 김형수의 형인 김진재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박정희시절부터 여기저기 부산지역을 마구 쑤시고 돌아다녔다. 청년회의소니 부산 싸이클 연맹이니 뭐니 닥치는대로 자리라는 자리는 마다하지 않았다. 총력안보 부산시 협의회 특별위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부산시 청소년 선도위원도 맡았다.

부산 동래구 새마을지도자연합회 고문직도 맡았다.

열심히 하면 위에서 알아보는 법, 전두환이 급조한 민정당 간판을 달고 11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막론하고 내리 5선의원이 되었다.

△ 한승수 ⓒ 네이버 검색 이 김진재의 아들인 동일고무벨트 기획이사 1972년생 김세연이 그 유명한 춘천 한승수의 딸 한상은과 결혼을 했다. 그러니까 왜 한승수가 무소속으로 있다가 뒤늦게 또 다시 한나라당으로 들어갔는지 답이 나온다.

그런데 이 괴상한 상황을 우리 서프앙들이 알아야 한다. 이 한승수가 박정희의 부인인 육영수의 조카 사위다. 한승수의 장모가 육영수의 큰언니 육인순이다. 그러니까 박근혜에게 한승수는 사촌 형부다. 한승수의 장인은 일제 만주국에서 관리를 지낸 홍순일이다.

이 박정희의 동서 홍순일의 사위들이 세명이나 국회의원이 됐다. 예전에 서주산업이라는 회사에서 나온 혓바닥 시뻘겋게 되는 아이스 바를 다들 먹어 봤을거다. 그 서주산업의 회장이 바로 국회의원을 지낸 홍순일의 다섯째 사위 윤석민이다.

한승수의 부인인 육영수의 조카 홍소자가 혜원여고 교장을 지냈는데 알아보니까 혜원여고 이사장 윤석민의 처형이네?? 헐... 신문에는 그런 관계가 안 나와서 참 재미가 없다.

홍소자랑 열린우리당 이미경의원이랑 친하게 지내지 않기를 바란다.

또 만주지역에서 엄청나게 크게 농장사업을 벌였던 천재라는 장덕진이라는 사람이 육영수의 언니 육인순의 사위다. 이 사람은 박정희정권하에서 장관도 지냈다. 분명히 장덕진과 한승수가 춘천고 동문으로 친분이 있어서 동서가 된 거 같다.

전국민이 뻔질나게 소풍가는 한국민속촌 회장 정영삼도 육인순의 사위로서 육영수의 조카 사위다.

어쨌든 이렇게 오만가지 요직은 다 해 먹었는데 무슨 박정희가 친인척을 등용하지 않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승수의 아들 한상준은 얼마 전 이희현이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내가 깊이 파보니까 이희현의 아버지, 그러니까 한상준의 장인은 유니드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이화영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 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웬걸??

이 이화영이라는 사람이 마지막 개성상인이니 뭐니 하면서 언론에서 띄워주는 성북동에 사는 동양제철화학그룹 명예회장 이회림의 아들이었다. 다들 봐서 알겠지만 ITV 폐업할 때 그 모습이 마지막 개성상인의 모습인가?

내가 그동안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후원회장 이회림이 왜 그랜드 서클 안에 안 들어오나, 의아했다. 그러니까 이회림과 한승수가 사돈을 맺은 거다.

어쨌든 한승수같이 유엔총회 의장까지 지낸 학벌 좋고, 경력 좋은 사람이 부인까지 데리고 가서 박정희를 추모하고 애도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 깜빡 속아넘어가겠다. 여러분, 한승수는 박정희의 조카사위에요, 조카사위!!!!!!!!!!!!!!!!!!!!!!!!!!!!!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아까 언급했던 박태준의 사위 중 튀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박태준의 딸 가운데 디자이너인 박경아가 있는데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과 이혼을 하고, 김병주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

김병주는 1962년생인데 얼마 전까지 미국 칼라일 그룹 아시아지역 회장 겸 이사였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를 졸업하였다.

김병주는 국민의 정부시절 자민련이 연정을 할 즈음 박태준이 총리가 되기 직전에 칼라일 코리아 사장이 되었다. 김병주는 쌍용정보통신을 꿀꺽 하더니, 5000억원을 쏟아부어 한미은행을 먹었다. 하나은행마저 잡아먹기 위해 공을 들였다.

한미은행을 4억달러에 사서 씨티 은행에 27억달러에 팔아먹었다. 물론 그 이익은 미국 칼라일의 몫이었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외국계 인사로 초대된 것으로 봐서 한국인이기 보다는 미국인으로 추정된다.

요즘 칼라일 간부 5명과 `MBK 파트너스`라는 사모펀드를 만들어서 돈을 긁어 들이고 있다. MBK는 마이클 병주 김의 약자다. 싱가포르 정부투자기관에서 5억 달러를 끌어들였고, 캐나다 교직연금에서 2억 5천만 달러를 끌어들였다. 삼성생명, 대우정밀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 인물은 민주개혁세력이 끊임없이 눈여겨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로 다시 돌아가자.

지금 청렴하다는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아들 박재석은 연필장사를 하다가 박정희 덕분에 국제전기기업 회장이 되었다. 자민련 부총재를 지냈던 조부영같은 사람이 거기 이사출신인 걸 보면 대단한 은혜를 입은 거다.

게다가 박무희의 또 다른 아들 박재호는 벽돌공장에 다니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후 동양육운 회장이 되었다.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있나??

박정희가 친인척에게 엄했고 공사구별이 철저했다는 소리는 다 뻥이다.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겠다. 이상과 같이 해 줄만큼 다 해주고 해먹을 만큼 다 해 먹었다.

최태민 문제는 서영석 대기자가 깊은 관심이 있는 영역인 듯 하므로 논외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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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가문 (제10 편) - 김성수家


 
한국의 명문가문은 2005년 9월에 피투성이님이 서프라이즈에 연재한 12편의 대한민국 명문가문들에 대한 글이다.

전라북도에 가봤더니 그 쪽 사람들, 특히 고창, 정읍 쪽 사람들은 "인촌 김성수" 하면 껌뻑 죽는다. 동네 공원에 무슨 동상도 있다. 전북을 빛낸 인물이래나...


대한민국에서 박정희가 학교마다 이데올로기 선동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세워놓은 이순신, 세종대왕, 이승복 어린이 동상 빼놓고 가장 많은 동상이 존재하는 사람이 김성수다.


그러나 지나가는 애들의 길을 막고 물어보라. 도대체 이 김성수가 무슨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길래 전국 도처에 동상을 세워놓고 김성수, 김성수 타령을 하는 것인지....


심지어 무슨 인촌기념관이니 인촌상이니 하면서 인촌 생일을 마치 예수님 탄신일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동아일보를 보면 무슨 "인촌선생은 민족의 암흑시절에 겨레의 등불과 같은 대선각자였다"면서 인촌정신을 선양하자고 허구헌 날 떠벌리고 있다.


민족의 새로운 대도약이 있어야 할 절박한 시점에서 우리 모두 인촌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대나 뭐래나.. 껄껄!!!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인촌 김성수에게 세 가지 업적이 있다고 한다.


△ 김성수 ⓒ 엠파스 검색



첫째 동아일보사를 창간하시고, 경성방직을 창업하시고, 보성전문학교를 중흥시켰으니 언론, 교육, 산업의 세 부문의 민족역량을 키우셨다고 한다.  


둘째 공산주의에 맞서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깃발을 높이 드시어 대한민국 건국기에 주춧돌을 놓으시는 선구적인 역할을 하시는 등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고 한다.


세째 독재정권에 단호히 맞서시며 대한민국이 걸어가야 할 길을 몸으로 가르치셨다고 한다.


따라서 국정난맥과 사회혼란이 심각하고 범죄가 횡행하는 이 어려운 시기에 공선사후 명지담백의 겸허한 인품을 지니신 인촌의 선비정신을 숭앙해야 한다고 떠벌리고 있다.


모르겠다. 인촌 김성수를 직접 대면해보지 않았으니....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인촌 김성수에게는 근거없는 찬양만 있을 뿐, 그 찬양에 걸맞는 실제 행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동아일보사 창간해서 일제에 아부하였다. 자기 돈벌려고 경성방직 창업한 것이다. 고려대학교도 김성수가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천출 출신인 등짐장수 이용익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것을 천도교 손병희가 인수했다가 호남 최고의 갑부 아들 김성수 손에 넘어간 것일 뿐이다.


김성수는 호남지역의 최고갑부인 1만 5천석 지기 김경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성수의 아버지 김경중이 소유한 토지가 무려 600만평이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거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동경의 세이소쿠 영어학교, 긴조 중학교를 거쳐서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다.  


24살의 나이에 중앙학원을 인수하고 학교장이 되었다. 너도 나도 어수룩한 시절에 호남 최고갑부 아들에,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으니 다들 껌뻑 죽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겨우 30살의 나이에 동아일보사 사장이 되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넘치는 돈으로, 회사설립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 아닌가?


단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고 민족의 영웅 칭호까지 받아야 하나?


김성수를 민족주의자로 사람들이 오인하고 있는데 김성수의 민족주의는 전체  민족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감내할 것을 민중에게 요구한 것이며 이는 민족주의를 매개로 전체주의적 국가주의 색채를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이 용감하게 "일장기 말소사건"을 일으켰더니 김성수가 혀를 차며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개탄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지금도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자랑하지만 그 창업자 김성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기자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라면 왜 김성수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파로 규정했겠는가?


무슨 정권의 음모가 있느니, 어쩌구 떠들지만 기본양심이 있다면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다 죽은 김성수를 친일파로 몰아서 얻을 수 있는 사적 이익이 어디있나?  단지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차원일 뿐이라는 것은 세살 먹은 아이들도 안다.


김성수가 △학무국 시국강연 강원반원 △학병출진 좌담회 참석 △유지시국간담회 발기인 △보성전문 직원 총동원(학병)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평의원 △흥아보국단 경기도 위원 △임전보국단 감사 등 ‘전쟁협력’ 행위를 벌인 것은 사실 아닌가?


매우 노골적으로, 매우 적극적으로 매일신보에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정신을 찬양하라' 등 친일논설까지 개제하고 라디오 강연에까지 출연하여 일제전시동원 체제에 협력하라고 선동하였다.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글도 썼다.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라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친일행위로 규정하지 않으면 도대체 친일행위는 무엇인가? 게다가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는 일본 천황에게 비행기까지 헌납하지 않았는가?  이보다 더 악질적인 친일행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언론사의 대표이고, 학교를 운영하는 이 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자 지도층이 양심을 저버리고 한 짓이다. 게다가 호남 최고의 갑부 아들이 한 짓이므로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친일행위를 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입이 살아서 나불나불 인촌선생 어쩌구 하는 거 보면 기가 차다.

일제 때 그렇게 친일을 하고, 해방이 되자 마치 독립운동이나 했던 것처럼 돌변하고서는 반공세력의 일원으로서 투쟁했다. 독자들과 학생들에게 일언반구의 반성도 설명도 없었다.


죽기 싫으니까 공산주의와 맞선 것도 무슨 자랑인가?  가만히 있었으면 공산주의자들이 친일파 김성수를 그냥 놔뒀을 것 같은가?  그러니 본의 아니게(?)  살기 위해서, 자기 재산 지키기 위해서 반공주의자로 앞장서서 공산주의 격퇴를 위해 헌신할 수 밖에 없었던 거 아닌가?

그리고 독재에 저항하면 뭘 얼마나 저항했다고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승만하고 권력다툼하다가 열 받아서 앓아누웠던 거밖에 없다. 1952년에 부통령으로 있을 때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 한국대표로 상의 없이 임명하니까 열받아가지고 지병인 중풍이 도져서 앓아누워 있다가 1955년에 죽은 거 아닌가?

그게 독재에 저항한 건가?  그거 가지고 침소봉대하면서 김성수가 민주주의 투사인양 호도하나? 진짜 민주화투쟁의 전위적인 역할을 했으면 아주 난리 나겠다.

이렇게 볼 때 김성수는 동아일보와 그 무리들이 칭송하는 만큼의 무슨 업적이 없다. 찬양만 넘친다. 김성수가 부통령으로 재임하는 기간에 경제가 발전했나, 민족문화가 활짝 꽃피웠나??  뭔데, 김성수, 김성수 하는 거냐??

김성수가 한 일이라곤 언론, 정치, 경제, 교육을 망라하는 제왕적인 권력을 그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것 밖에 없다. 족벌사학, 족벌언론의 기틀을 만든 거다.


이게 김성수식 공선사후다. 


그 제왕적 권력을 바탕으로 그 후손들이 친일행각을 벌였던 선조 김성수를 애국자로 둔갑시키고, 거대언론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왜곡작업을 벌이고, 학원 인사들이 총동원되고, 인촌상이니 뭐니 하는 것을 이용하여 대중을 상대로 치밀한 상징조작을 하는 것 아닌가?


민주주의니 자유니 하는 김성수와 어울리지도 않는 크레덴다를 사용해서 김성수의 친일행각을 합리화하는 거 아닌가?


거기다가 민족주의자 옷까지 억지로 입히고, 문화주의자 이미지까지 곁들여 완전히 성인군자 대쪽선비 이미지를 연출하여 그것을 동아일보 부수 늘이고 김성수의 후손인 울산김씨 후손들이 영원히 동아일보, 고려대학교를 지배하는데 악용하는 거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 김성수의 묘를 고려대학교 내에 꾸미고, 인촌기념관을 만들고, 동상까지 세워서 우상화를 한 거다. 이런 민족반역자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서 건국훈장까지 주었으니 역사가 뒤틀리게 되는 거다.


그러나 똑똑한 고대생들은 친일파 김성수의 우상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성수의 묘에 똥을 싸고, 오줌을 싸고, 침을 뱉었다.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경기도 모처로 이장하였다.


그 뿐인가??  용기있는 고대생들은 김성수의 동상에 수의를 입히고 한달동안 새끼줄을 꼬아서 모가지에 걸어 잡아당겼다. 1989년 4월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얼마나 철심을 깊이 박았는지 동상을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친일조각가 김경승이 만든 동상을 고대생들이 쓰러뜨리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위대한 애국충정의 고대정신이 발현된 사건으로 민주개혁세력은 기억한다.


물론 김성수에게도 빛이 있고, 그림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 드골이 내세웠던 "최우선 가중처벌"의 개념을 생각해봐야 할 거다. 나치에게 아부하고 부역했던 소위 매춘언론인을 프랑스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하게 처벌했다.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없이 처단해야 한다"는 드골의 입장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전원의 매춘언론인이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총살형을 받았다. "간과 쓸개"를 내놓은 언론인으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었다. 프랑스의 매춘언론인이라고 그 품성이 김성수만 못하고, 업적이 김성수만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거대언론 사설에 아직도 인촌정신을 선양하자는 식의 글이 올라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게다가 김성수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제국은 고스란히 그의 아들 김상만에게 이어지고, 김상만은 또 다시 아들 김병관에게 물려주고, 또 김병관은 이제 김재호에게 제왕의 바톤을 넘기려고 하고 있다.
일본 천황에게 비행기까지 헌납했던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또한 삼양사의 창업자로서 수당장학회니 뭐니 하며 또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중추원 칙임참의 겸 만주국 명예총영사 겸 임전보국단 간부였던 김연수가 일본천황에게 바친 국방헌금 총액이 80만원이다. 물론 80만원은 김연수로서는 그렇게 큰 돈이 아니었다. 1년에 보통 80만원을 벌었으니까. 그러나 군수, 학교 교장의 월급이 당시 100원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면 천문학적인 돈이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800억 원이다. 게다가 1944년에는 자본금 5000만원을 투입하여 조선항공공업회사를 설립하면서 일제 공헌의 대미를 마감한다. 5000만원이면 지금 돈으로 치면 5조원이다.

그러나 김연수는 지금 민족자본 육성의 수범자로 떠받들여지고 있다.


삼양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경제정의는 기업미래다."라는 구호아래 투명경영에 앞장선다고 한다. 그런데 "미디어 오늘"을 보니까 삼양사가 지난 추석 명절을 맞이해 신문사에 기업 광고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자사 설립자의 친일 행각을 보도한 한겨레신문만을 제외했다.


참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겠다. 가만히 그냥 예전에 저지른 실책을 부끄러워하면서 앞으로는 잘 하겠다 생각한다면 거기다가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그런 그 형 인촌 김성수는 민족의 대선각자이고, 그 아우 수당 김연수는 민족자본 육성의 수범자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일색이니.....

앞으로 일본 놈들이 쳐들어오면 또 그 지랄을 하겠다는 거 밖에 더 되냐?


문제는 김성수, 김연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집안이 엄청나게 막강한 세력을 여전히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성수의 막내여동생 김점효는 전경련 회장을 역임한 김용완과 결혼하였다. 김용완과 김점효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얼마 전까지 전경련 회장을 지낸 김각중이다.


김각중은 경기도 수원의 갑부인 차준담의 막내딸 차현영과 결혼을 했는데 이게 좀 골 때린다. 김각중의 외사촌형인 김연수의 세째 아들 삼양사 명예회장 김상홍도 김각중의 부인 차현영의 언니 차부영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장인이 똑같다. 그러니까 사촌형이랑 동서지간이 되는 거다. 김각중의 아버지 김용완이 김상홍에게는 고모부인데 겹사돈으로 이거 아주 골 때리게 되는 거다.     

△ 김각중 ⓒ 엠파스 검색

김용완의 둘째 딸 김인중은 의사로 있다가 성주호라는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이 김용완의 사위 성주호가 충청남도 대전일대를 주름잡는 학원재벌인 창성학원 이사장이다. 소유한 학교가 도대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다. 


김용완의 세째 딸 김봉애는 동아일보 창간멤버 한기악의 아들인 출판사 일조각 사장인 한만청의 부인이 되었는데 이 한만청의 형의 장인이 고려대학교 총장과 신민당 당수를 지낸 그 유명한 유진오다. 이 유진오의 머리에서 대한민국 헌법이 나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유진오 또한 대일본제국의 '영원한 승리'를 다짐한 한국현대사의 큰 별이다. 이 유진오가 "병역은 힘이다."라는 글을 신문에 썼고,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며 대화일치를 강조했던 것이다.


언론보국회의 회원이던 이 유진오가 느닷없이 해방이후 기회주의적으로 돌변하여 헌법학의 권위자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또한 지독한 친일파 유진오는 김성수와 똑같이 철저한 반공주의를 앞세워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면서 건국의 기수가 되고 말았다. 그가 훗날 윤보선, 박순천, 유진산 등과 더불어 한국 야당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지만 윤보선의 막내삼촌 윤치영이 박정희 공화당 하에서 의장을 해 먹는 식으로 사실 다 똑같은 친일파들이다. 박사니 뭐니 하면서 민중의 머리꼭대기에 앉아 군림했던 것이다. 적어도 유진오 류는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자가 아님은 물론 부끄러움을 아는 자도 못되는 것이다.


그 유명한 박동진이 유진오의 사위다. 박동진은 박정희정권에서 외무부장관을 역임하고, 전두환 정권 하에서 두번이나 민정당 전국구 의원을 지내고, 주미대사까지 해 먹은 자다. 박정희 아들 박지만 결혼식 할 때도 민관식 등과 더불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거봐라. 민주화투쟁을 했다는 자의 사위의 이력이 이렇게 균형이 안 맞는다.



어이구, 어쩌다가 얘기가 여기까지 왔나? 다시 김용완으로 돌아가자.

김성수, 김연수의 매제인 김용완에게 김용관이라는 동생이 있다. 김용관의 아들 김화중이 LG그룹 명예회장인 구자경의 장녀 구훤미와 결혼하였다. 이로써 동아일보 가문과 LG가문이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훤미와 현 LG그룹 회장 구본무가 친남매지간이다.

그런데 이 김화중과 구훤미 사이에서 낳은 딸 김선혜가 대림그룹 회장 이준용의 장남 이해욱과 결혼하였다. 대림과 LG의 결혼이자 동아일보의 결합이다.


웃긴게 대림그룹 회장 이준용의 막내 작은아버지 이재연이 LG 창업자 구인회의 둘째 딸 구자혜랑 결혼하였다. 참 복잡하게 엉키기도 한다. 그러면 구훤미의 딸 김선혜 입장에서 구자혜는 고모할머니냐?  시댁 쪽 작은할머니냐?  외가, 친가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다시 원위치해서 또 김용완은 국제그룹 창업자 양태진의 처남이 된다. 그러니까 국제그룹 회장이었던 양정모의 외삼촌이다. 당연히 현재 대한전선그룹을 맡고 있는 양정모의 동생 양귀애의 외삼촌도 되는 것이다. 양귀애의 시동생 설원봉이 대한제당 회장이다.


짧게 살펴 봤지만 얼마나 막강한가?  김용완의 장남 김각중이 경방을 이어받아서 다시 그 장남 김준에게 넘겨주려하고 있다.


이 김준은 주의관찰대상이다. 민주개혁세력이 경계하는 브이 소사이어티라는 단체의 회원이다. 민주개혁세력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 YEO라는 단체의 회원이기도 하다. 최태원과 각별한 사이인데다가 타이거풀스 전 대표이사 송재빈과 막역한 사이다. 송재빈이 누군가?  허주 김윤환의 사위 아닌가?  얼마나 친한지 타이거풀스에 투자까지 했었다. 이러니 민주개혁세력이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다.


또 그 동생 김담도 마찬가지로 민주개혁세력이 눈을 뗄 수 없는 인물이다.

김준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교수 임창생의 장녀 임진희와 결혼을 하였다. 내가 생각할 때 이 김준이 또는 김각중이 어떻게든 이경서라는 사람과 연결이 되어 있다. 이경서라는 사람이 과학자 출신인 걸 감안한다면 임창생 쪽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임창생이 원자핵공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이경서는 장거리유도탄을 만든 사람이니까. 내 추측이 거의 틀리지 않을 거다.

그런데 재밌는게 이경서는 국제화재보험 이필석의 아들이다. 그 형이 이회창의 사돈인 이봉서다. 만일 이경서가 김각중의 사돈 임창생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다면 핵물리학자에, 장거리 유도탄 전문가에, 이봉서는 동자부장관을 지냈으니 이거 참 엄청난 에너지의 집안이다. 껄껄껄


이경서의 아들, 그러니까 이필석의 손자이자 이회창과 사돈인 이봉서의 조카 이성혁이라는 청년이 요즘 민주개혁세력의 레이더망에 자주 걸린다. 관세청에서 조금 근무하다가 단암전자통신의 대표이사를 맡았고, 에퀴터블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는데 중앙일보가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듯 해서 요즘 관찰 중이다.


다시 김성수 쪽으로 가보자.   

김성수의 아들로서 동아일보, 고려대학교를 계승한 김상만은 동생 김상기와 한판승부를 벌였다. 동아일보 회장을 맡기도 했던 김상기와 동아일보 고려대학교 대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었다. 격렬한 후계전쟁을 펼쳤다. 결국 김상기 계열의 곁가지들은 모두 동아일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김상만 계열만 남았다.


영국 런던대와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김상만은 민주개혁세력에게 엄청난 불쾌감을 안겨준 인물이다. 동아일보 곡필은 차치해두고서라도 1989년 5월에 고려대학교 부정입학의 전모가 드러난 사건은 김상만의 됨됨이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당시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애국적인 민주개혁세력의 전위부대 고대생 1000여명이 고대 본관을 점거하고 농성하였다. 총무과 캐비넷을 열고, 총장실 금고를 부쉈다. 이때 기절초풍할 문건이 나왔다. 어마어마한 부정입학 자료였다. 점수조작의 명명백백한 데이타가 나온 것이다.


양심적인 고대생들은 분개했다. 고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김상만은 허겁지겁 자료를 폐기하고 요로에 손을 써서 사태를 간신히 무마하고 반발하는 교수를 해직시켰다. 당시 도올 김용옥선생도 격렬하게 고대의 부정입학 실태를 비판했다. 


나는 그래서 고려대학교의 모 교수가 신문을 통해서 도올선생을 지나칠 정도로 비판할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그럴까... 이상하다....

어쨌든간에 김상만은 그런 식으로 해서 아들 김병관에게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를 고스란히 물려줬다.


△ 김병관 ⓒ 엠파스 검색

김성수의 손자인 이 김병관의 행태가 또 우습다. 이 사람은 횡설수설과 술주정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고려대 정문 앞에서 술을 마시고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심지어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거 회장한테 술 좀 그만 묵고 다니라 그래라. 그래갖고 회사나 학교나 제대로 운영이 되겠나?”  


동아일보 명예회장이자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이 김병관이라는 사람이 한 짓을 보면 아주 웃겨서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다. 왜 이런 우스꽝스런 얘기들이 동아일보 횡설수설 코너나 휴지통 코너에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김병관은 고려대 정문에서 술이 취해 가지고 북한 노래 <심장에 남은 사람>이라는 노래를 읊조리기도 하고, 자신이 주사파라고 욕했던 학생들이 농성하는 곳에 퍼질러 앉아서 같이 반 아셈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또 느닷없이 '한국 신문의 조폭적 행태'라는 칼럼을 복사하여 흔들면서 횡설수설을 하기도 했다. 또 낮술에 취해가지고 동아일보 편집국을 방문한 '왕과비'의 여주인공 채시라에게 “대왕대비 마마!”를 엎드려서 외쳤다고 한다. 껄껄껄!!!!!


결국 이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춘 술주정이나 상습적으로 하는 인물이 우연히도 동아일보 사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덕에 세습사주가 되어 대한민국 대표신문과 여론을 좌지우지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웃고 말 일은 아니다. 이런 인물이 한국 언론과 교육의 주요부분에서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처절하고 끔찍한 일이다. 물론 이런 어이없는 사회지도층 인사의 술주정이 보도가 안되는 것은 당연하다.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하니까.


세금도 제대로 안 내서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김병관은 요즘 다시 그의 큰 아들 김재호에게 동아일보를 물려주려고 하는 모양이다. 김재호는 자민련 총재,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동의 사위다. 이한동의 또 다른 사위는 LG전선 명예회장 허준구의 다섯째 아들인 허태수 GS홈쇼핑(LG홈쇼핑이 개명) 대표이사다. 


이러니 동아일보는 LG그룹, GS그룹과 연결이 된다. 김병관의 장남 김재호의 동서의 바로 위 형이 허명수 GS건설 부사장인데 이 사람의 부인이 신군부의 12.12 쿠데타 때 북한이 쳐들어 온 것으로 오인하고 식구들만 데리고 도망쳤던 국방부장관 노재현의 딸 노경선이다. 헉!!!!!!!


김병관의 작은아들은 그 유명한 삼성그룹 이건희회장의 둘째 사위 김재열이다. 이건희의 딸 이서현이 횡설수설 김병관의 며느리다. 껄껄

손위처남인 이재용상무와 청운중학교 동창인 김재열은 아버지와 장인어른 덕에 나이 서른 중반에 벌써 제일모직 상무이사가 되었다. 화이팅!!!!!!!!!!!!!!!!


김성수의 동생인 삼양사 김연수 쪽을 살펴보자. 김연수는 7남 6녀를 낳았으니 꽤 복잡하다.

우선 작년에 사망한 큰아들 김상준은 삼양염업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김상준의 둘째 딸 김정희가 동부그룹 회장 김준기와 결혼하였다.


이 김연수의 손주사위 김준기의 아버지는 자유당에서 3, 4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박정희의 공화당에서 6, 7, 8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유정회 국회의원까지 지내고 국회의장까지 역임한 7선의원 김진만이다.  김진만은 본래 강원도 동해의 대지주인 김향경의 아들이다. 김진만은 현재 민족중흥동지회 회장이다.


민족중흥동지회가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는 이름만 들어도 다들 알 것이다. 전직 공화당, 유정회 의원 및 유신시절 장·차관, 박정희 측근 등이 모여서 박정희를 추모하고 기념하다가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으로 발전했다. 현재는 물론 대다수가 한나라당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런데 이 김진만의 아들 가운데 열린우리당에서 국회의원을 했던 사람도 있으니 놀라 자빠질 노릇이다. 김택기의원이 바로 김진만의 아들이고, 동부그룹 회장 김준기의 동생이다. 김택기의원의 장인이 한국자유총연맹 이철승이다. 헐!!!!

김진만의 딸 김희선은 농심그룹 회장 신춘호의 아들 율촌화학 부사장 신동윤과 결혼하였다.

이 김진만의 딸 김희선의 시누이 신윤경이 태평양 대표이사인 서경배와 결혼했고, 이 서경배의 형 서영배가 조선일보 명예회장 방우영의 딸 방혜성과 결혼했으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과히 멀지도 않다.

물론 방상훈 - 허광수 -  김동조 - 정주영 - 노신영 - 홍진기 - 이병철 - 김병관으로 이어지는 방법도 있다.

김진만의 딸 김명희는 소설가 김동리의 아들 김평우와 결혼했다. 또 다른 아들 김무기는 서울대 문리대학장 이종진의 딸 이지은과 결혼했다.

어쨌든 김연수의 사돈인 거물정치인 김진만 집안이 이렇듯 막강하다. 한국 겹사돈 클럽을 연결하는 고리다.

김연수의 손주사위 김준기의 딸 김주원은 파산한 리젠트화재해상보험(해동화재) 회장 김효일의 아들과 결혼하였다. 물론 파산을 했다고 해서 완전 망한 건 아니다.

김준기의 아들은 강남, 분당에서 잘 나가는 그 유명한 차병원 원장, 포천중문학원 이사장 차경섭의 손녀, 차광렬의 딸 차원영과 결혼하였다.

김연수의 둘째 아들 김상협은 문교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 사람은 내가 보기에 군사독재자가 정권의 기반이 약할 때 갖다가 방탄용으로 쓰는 사람이다. 박정희정권 초기에 42살의 나이에 문교부장관이 되었다. 그리고는 사촌형 김상만이 이사장으로 있는 고려대학교 총장을 도합 10년간 맡았다. 그러다가 전두환이 집권 초창기 국무총리로 불러서 또 1년여간 군사독재정권을 방어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사실이 이러하니 동아일보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김상협은 동아일보 이사, 감사 역할도 수행한 바 있다.

광주에서 피바다를 일으키고 정권을 찬탈한 정통성도 없는 살인마 군사독재정권의 총리 노릇을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교수 출신의 고려대학교 총장이 덥썩 수락하는 것이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인촌 김성수의 조카가 할 짓인가?  최초의 대학총장 출신의 국무총리라며 칭찬일색이다. 군사독재정권에 부역한 최초의 대학 총장이 자랑스러워??  껄껄...


김상협의 외아들 김한은 메리츠증권 대표이사다. 언론에서 은근히 띄워주고 있다. 제목이 보통 이런 식이다. "CEO 책임 다하려 사재 털어..."  

장난치냐? 장난쳐?


사촌동생 김각중과 동서가 된 세째 아들 김상홍이 삼양사 그룹을 이어받았다. 그의 아들 김윤이 그 대업을 계승해가고 있다. 김윤은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김종규의 딸 김유희와 결혼하였다.


김상홍의 큰딸 김유주는 윤주탁의 아들 윤영섭과 결혼하였다. 윤영섭은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다. 그런데 이 윤영섭의 동생이 윤영각이다. 이 윤영각의 부인이 박진아다. 박진아의 아버지가 바로 그 유명한 포철 명예회장 박태준이다. 껄껄...

게다가 김상홍의 둘째아들 삼양제넥스 대표이사 김량은 박정희정권하에서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장지량의 딸 장염은과 결혼했는데 이 장염은의 오빠가 국민의 정부 말기에 부동산 투기의혹에 휩싸여 비운의 국무총리서리로 낙마한 매일경제신문 회장 장대환이다. 요새 신문협회장을 맡고 있다.


매일경제신문 2005년 9월 21일자를 봐라. "김상하 삼양 회장이 대한상의를 장기간 이끈 것은 당시 존경받는 기업인의 대표격이었기 때문이다."  껄껄껄...


김연수의 다섯째 아들 김상하는 김상홍의 동생이다. 삼양사 회장이다. 김상하의 딸 김영란이 모나미 회장 송삼석의 아들 송하철과 결혼하였다.


김연수의 큰 사위가 나비넥타이 매고 텔레비전에 나와서 사람들을 웃기는 아폴로박사 조경철이다.


김연수의 다섯째 사위는 서울대 부총장을 지낸 김영국이다.


김연수의 여섯째 사위는 인공심장의 권위자라는 김성완이다.


하여튼 간에 친일파로 거론되는 김성수, 김연수 가문, 정말 무지하게 막강하다. 다 언급하다가는 녹초될 지경이다.


막판에 김연수 아들, 딸들은 너무 힘들어서 소홀히 다뤘다. 또 김병관의 아들 김재열의 처가쪽은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앞으로 더욱 세밀히 짚어보겠다.  

고려대학교, 김성수, 명문가문, 서프라이즈, 인촌, 피투성이



한국의 명문가문 (제11 편) - 방응모家


 
한국의 명문가문은 2005년 9월에 피투성이님이 서프라이즈에 연재한 12편의 대한민국 명문가문들에 대한 글이다.

자, 날씨도 좋으니 한국의 명문가문(?)에 대해 또 논해보자.

요 며칠 머리가 아팠다. 사실 이 작업은 상당히 골치가 아프다. 가뜩이나 싫어하는 수구떼들이 혈연과 혼맥으로 얽히고 설켜 있는 징그러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정리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특히 하루 종일 듣기도 싫은 이름들이 머리 속에 뱅뱅 돌아다니는 것은 매우 불쾌하고 짜증난다.

어쨌든 고구마 줄기같은 수구떼 지도를 완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오른다. 오늘은 그 11편, 조선일보 방응모 집안이다.

민주개혁세력 사이에서 이 집안의 방응모, 방일영, 방우영, 방상훈과 그들이 운영하는 조선일보는 너무나도 악명이 높아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 조선일보의 100대 죄악이라는 것을 정리해 놓은 사람들조차 있었다.

그 걸작을 한번 살펴보면 조선일보의 죄악은 크게 10가지로 분류가 된다.

△ 조선일보사 ⓒ 엠파스 검색


◆ 우선 민족의 정기를 짓밟은 친일행각이 조선일보의 10대 죄목 가운데 하나다. 윤봉길의사를 범인이라고 지칭하고 일본군을 아군, 황군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스스로를 민족 정론지라고 칭하고 있다.

◆ 두 번째 죄악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독재정권 찬양이다. 전두환 신군부와 결탁하여 급속하게 성장한 조선일보는 지금도 전사적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찬양에 열을 올린다.

◆ 세 번째 죄악은 최대부수의 신문권력을 악용하여 민주화인사를 탄압하고 얼토당토한 사상검증을 하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김정남, 한완상, 최장집 등을 황당한 빨갱이 여론몰이로 낙마시켰다.

◆ 네 번째 죄악은 국가안보를 상품으로 팔아먹는 반민족적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위협, 공포감 조장, 적대감, 긴장감을 유발시켜 여기에 편승해 신문장사를 한다.

◆ 다섯 번째 죄악은 악랄한 지역감정 조장이다. 특히 호남인에 대한 차별이 극단적이다. 그래서 민주개혁세력은 조선일보를 반호남의 소굴이자 영남패권주의의 본산이라고 본다.

◆ 여섯 번째 죄악은 반통일적인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 대한 상식이하의 딴지걸기다.

◆ 일곱 번째 죄악은 잦은 오보와 상습적인 곡필로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어 한국의 국가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이다. 86년 김일성 사망설이 대표적이다. 물론 김일성 사망설 그 자체보다는 타이밍이 문제다. 정권이 존립의 위기에 있을 때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드는 교묘한 공작을 조선일보는 밥먹듯이 해 왔다. 금강산 댐도 마찬가지... 서울 불바다 뻥 튀기 보도도 마찬가지...

◆ 여덟 번째 죄악은 인권유린 사건에 대한 왜곡보도와 IMF 국가부도를 불러들인 책임이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한 왜곡보도가 대표적이다. 또 IMF사태 "이틀"전까지 "외환위기 없다"며 되풀이 호언장담하면서 대한민국 일등신문이라는 것이 한가하게 사상논쟁이나 했다.

◆ 아홉 번째 죄악은 제왕적인 족벌세습경영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공공재인 신문을 사유물로 전락시키면서 편집권을 강력하게 행사한다.

◆ 열 번째 죄악은 "나는 너를 비판해도 너는 나를 비판할 수 없다"는 오만과 독선으로 한국 사회의 최후의 성역으로 언론독재체제를 유지해 온 것이다. 이런 특권적 발상이 오만방자한 권력을 행사하고 불법을 자행하게 하는 근원적 요인이다.

이상 조선일보의 큼직큼직한 죄악을 열 가지로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그들의 무책임한 반민주적, 반민족적 행태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노무현대통령은 조선일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싸우는가. 유시민 지음
ⓒ 엠파스 검색





○ 조선일보는 이미 신문도 아니고, 언론도 아닙니다. 조선일보는 수구특권세력의 선봉이며, 한나라당 이회창후보의 기관지에 불과합니다. (2001.6.28 민주당보와의 인터뷰)

○ 나는 일찍이 "조선일보는 이회창의 기관지"임을 선언한 바 있다. 이회창총재와 한나라당 의원의 발언은 아무런 근거없는 내용도 여과없이 대서특필하고 사설,칼럼으로 맞장구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설, 칼럼으로 공개훈수를 하기도 한다. (2001.9.11 노무현 홈페이지 무현생각에서)

○ 조선일보와 싸우는 것은 민주화운동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일보의 상품성과 신뢰도를 높여주는 인터뷰는 할 수 없습니다. (2001.11.19 노무현 홈페이지 무현생각에서)

○ 조선일보의 부당한 공격의 피해를 본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도 조선일보의 편파와 왜곡보도에 짓밟혀 고통받는 수많은 분들에 대한 인간적 도리 차원에서도 조선일보의 인터뷰에는응할 수 없습니다. (2001.11.19 노무현 홈페이지 무현생각에서)

○ 조선일보가 극심한 왜곡,편파보도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에 최후의 수단으로서 나의 지지자들과 함께 조선일보 불매운동을 전개할 것입니다.(2001.11.19 노무현 홈페이지 무현생각에서)

○ 더이상 불공정신문 조선일보에게 아첨할 이유가 없습니다. 조선일보와 싸워서 이겨야 민주당이 정권재창출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언론은 개혁되어야 하고, 4분의 3인 영향력을 절반이하로 줄여 비주류의 힘으로 전락시켜야 합니다. (2001.11.26 광주무등산관광호텔에서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 조선일보는 공정한 보도를 하지 않는 신문입니다. 친일경력과 군사독재정권과 결탁했던 과거가 있는 신문입니다. 기득권층의 편에 서 있는 신문이고,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적대적인 신문입니다. 그들이 왜곡보도를 하는 한 국민들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언론의 정도를 벗어난 신문과 어떻게 인터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깎아내려야 합니다. (2001.12.3 오마이뉴스 인터뷰)

○ 조선일보가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정권하나 세워보고 싶습니다. (2002.1.31 전국대학신문 기자 간담회에서)

○ 비열한 조선일보의 반격보다는 우리 사회의 기회주의적 처신을 원만하고 노련한 것으로 생각하는 허위의식이 더 고민됩니다. (2002.1.31 전국대학신문 기자간담회에서)

○ 조선일보는 권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 앞에서 슬금슬금 피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기 조금 철없는 것처럼 싸우는 정치인 한 사람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2002.2.20 오마이뉴스 인터뷰)

○ 소유지분제한 소신을 포기하라는 족벌언론의 압력에 굽히지 않아 이렇게 부당한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언론에게 고개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겠습니다. 도와 주십시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 ( 2002.4.6 민주당 대통령후보 인천지역 경선 연설에서)

○ 저는 아내에게 불만이 없습니다. 불만이 있다면 딱 하나 있습니다. 조선일보 보지 말라고 해도 자꾸 조선일보를 봅니다. 그것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계속 봅니다. (2002년 4월 7일 민주당 포항경선 연설에서)

○ 조선일보와 인터뷰는 앞으로도 안합니다. 조선일보는 분명히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언론의 정당한 권리로서 비판하는 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 이겁니다. 그러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서 거짓말하면 안되지요. 공정성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2002.4.30 오마이뉴스 창간1 주년 기념인터뷰)

○ 분명하게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조선일보 사장님 회장님처럼 그렇게 고상한 말만 쓰고 살지 않는지 모르지만 그 분들처럼 천황폐하를 모시고 일제에 아부하고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가지고 뒤돈 챙겨서 부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회주의적인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2002. 6. 30 경기도 시흥시 지방선거 지원연설에서)

○ 개혁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세력이 바로 조선일보이며, 조선일보가 가장 굳게 손잡고 있는 정당이 바로 한나라당입니다. (2002. 9. 28 오마이뉴스 인터뷰)

○ 조선일보와 공개토론을 제안합니다. 국민들 앞에서 공개토론 한번 해봅시다. 생방송으로 합시다. 언론이 자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악의적으로 특정인을 겨냥해서 그 사람을 해치는 그런 악의적인 기사를 마구 왜곡하고 조작해서 쓰는 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1인 지배체제입니다. 생사여탈권을 회장과 사장이 가지고 있습니다. (2002. 9.28 오마이뉴스 인터뷰)

○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각을 세우고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을 마땅치 않게 보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신문이) 너무 악의적이고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신문에 협력해서 상품성을 높여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부당한 구조와 협력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건 누구건 부당한 구조와 협력하지 않아야 합니다. (2002. 11. 1 미디어 비평과의 인터뷰에서)

○ 당신, 무슨 언론에게 고통을 받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선거전날요, 정몽준후보가 노무현과 공조를 파기했다는 그 신문을 무가지로 어마어마하게 해 가지고 온 천지에 뿌리고.. 조선일보 그랬지 않습니까?? 이거 진실입니다. 진실이구요...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그 다음에 제가 당선되고 난 이후에 흔히들 밀월을 얘기하는데, 대통령 당선된 그날부터 저한테 비판의 칼날을 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합리적인 비판만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서 말이 나왔으니까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그냥 원칙대로만 가겠습니다. (2003. 5. 1 MBC 백분토론에서 중앙일보 김영희의 질문을 받고)

어쨌든 근래에는 대통령께서 그냥 꾹 참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조선일보의 불공정성과 편파성이 시정된 것은 결코 아니다. 대통령이 대통령이기 때문에 못하는 말을 이제 유시민의원이 앞장서서 한다.

"<조선일보>나 <문화일보> 같은 경우는 정상적인 언론기관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치집단입니다. 대한민국을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지배하고 싶어하는 정치적 욕구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언론행위라는 것을 빙자해서 사실상의 정치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죠. 내용적으로는 정치적인 행위를 하면서 그것에 관해 비판하면 '언론에 대해서 왜 탓을 하고 왜 탄압하려고 하느냐, 언론은 본디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인데, 왜 우리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느냐'고 나옵니다. 이것은 언론의 행위가 아니죠." - 2005. 8. 31 오마이뉴스 인터뷰

이쯤 해두고 우선 신문재벌 방씨일가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는 계초 방응모에 대해 알아보자. 본래 방응모는 머리가 좋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거의 맨손으로 광산사업을 시작했다. 운 좋게 금맥을 발견, 떼돈을 벌었다. 1932년에 방응모가 거머쥔 돈이 135만원. 지금 돈으로 치면 1350억원이다.

△ 계초 방응모 ⓒ 엠파스 검색


 

1350억원을 거머쥔 방응모는 광산사업을 그만두고, 20만원, 지금 돈 200억원을 투자하여 조선일보를 인수한다. 또 12만원, 지금 돈 120억원을 투자하여 태평로 일대에 1400평의 땅을 사서 당시 초고층 빌딩인 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방응모는 사업가다운 면모가 있었나보다. 그 후 50만원, 지금 돈 500억원을 투입하여 새로운 윤전기를 도입하는 등 시설투자를 했다. 또 50만원을 투입하여 경기도 수원에 97만평 규모의 간척사업을 전개하였다.

놀라운 것은 함경남도 일대에서 무려 3천 2백만평 규모의 조림사업을 진행하였다는 거다. 장차 신문용지를 확보하려는 계산이었다고 한다. 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마케팅기법을 도입하고, 중량급의 인사들을 주필로 영입하고, 조선일보 이외에 월간지, 여성지, 소년지를 또 창간하였다.

물론 친일행각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일보라는 신문 자체가 친일실업인 단체인 대정친목회 명의로 발행허가가 나고, 친일악덕지주 예종석을 발행인으로 하고, 친일상공인 조진태를 초대사장으로 창간되었으며(1920년), 이후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일보를 경영했던 수치스런 과거를 가지고 있는 신문이다. 이것을 방응모가 사들여 운영한 것이다.

예종석과 조진태는 일본에 빌붙어 이권을 챙기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적용하여 고혈을 짜낸 악질적인 인간들이다. 또한 송병준이 누구냐? 이완용과 더불어 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진회의 중심멤버요 최고의 매국노다.

이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방응모 또한 부끄러운 친일행각에 나서게 된다. 1934년 당시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신문사 사장의 하루 - 방응모씨"라는 글에는 "저녁이면 사교관계로 명월관, 식도원으로 돌아다니면서 재벌과 대관 집을 찾기도 하고... 가와시마 군사령관의 저녁초대를 받고 갔다가 돌아와서는 고사포도 기부하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자신이 운영하는 월간지에 발행인 방응모의 이름으로 스스로 기고한 글을 봐도 친일파 방응모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대일본제국 2천 6백년의 빛나는 역사에 청렴강직한 대화정신과 팔굉일우의 이상으로써 닦아놓은 성업은 일계직통의 천황어능위를 봉하여 우리 국민은 이 성은 속에 만폭적 희열을 느끼고 있다.... 천황, 황후 양 폐하의 성수무강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방응모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일종의 장사꾼이다. 언론사를 경영하면서도 장사꾼적인 기질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기적인 변화에 편승하였던 것이다.

반도 최고 갑부에 해당되는 방응모가 먹고 살기 위한 친일을 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적극적인 친일행위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인간적으로 좀 가엾기는 하다. 방응모가 해방이 된 이후 조선일보를 속간하면서 쓴 속간사를 보면 "우리는 입을 가졌으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였으며 할 말은 많았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 우리는 죽으라면 말없이 죽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될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써 있다. 물론 변명과는 달리 방응모의 친일은 자기방어의 한계를 넘는 행위였다.

부패와 타락이 그 본질인 사회에서 깨끗한 사람은 좀 거만하게 굴어도 된다는 김남주 시인의 시도 있지만 어쨌든 방응모가 겪었던 시대적 상황에 내가 처해보지 않았으니 그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서 왈가왈부할 입장은 못된다. 그러나 설령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방응모 자신과 그 일가 그리고 조선일보가 보다 통렬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정도를 걸어야 할 사회적 양식의 표상인 언론의 이름으로 행했던 자신들의 비겁함과 한계를 보다 확실하게 드러내고 그 잘못된 과거를 부끄러워하면서 철저하게 반성적 고민을 하는 모습을 조선일보가 보여주었더라면 지금처럼 시민들에게 조롱과 불신을 당하는 조선일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조선일보가 그 잘못된 역사를 어떻게든 변명하고, 미화하고, 굴절시키고, 은폐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방응모의 친일행각보다도 더한 퇴영적인 결과를 유발하기에 더욱 그렇다.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6.25가 발발하여 북한 인민군들에게 납북되는 불행한 결과로 끝을 맺었다.

<압록강변의 겨울-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이라는 책에 의하면 방응모는 납북 도중 이회창의 고향으로 유명한 황해도 서흥군 부근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고 사망하였다. 미군 전투기 4대가 날아들어 닥치는대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사격을 하는 바람에 노근리의 유족처럼 민간인인 방응모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조선일보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1991년에 북한 정무원 부부장까지 지낸 신경완이라는 사람의 구술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자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을 지낸 이태호씨가 쓴 매우 신뢰성이 높고, 자료가치가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책인데, 조선일보는 사주가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

역사는 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 한홍구 교수에 의하면 조선일보가 펴낸 방응모의 전기도 납북장면에서 그냥 끝나고 만다고 한다. 한홍구 교수는 그 이유를 궁금해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납북해 간 인민군만 죽일 놈이고 정작 할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전쟁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일까?"

하여튼 방응모의 납북 이후 방일영의 시대가 도래한다.

△ 우초 방일영 ⓒ 엠파스 검색


방일영은 방응모의 손자다. 그 사이에는 방재윤이 있다. 방재윤은 방응모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사실은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본래 방일영의 아버지 방재윤은 방응모의 조카다. 그러나 방응모가 아들이 없어서 조카를 양아들로 삼은 것이다.

방응모가 양자로 들인 방재윤이 방일영, 방우영 형제를 낳고 1940년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1943년, 골 때리게 방응모가 환갑의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 생물학적 순리를 거역하면 불가피하게 심각한 투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방응모가 환갑에 아들을 낳았을 때 이미 손자 방일영은 스무살이 되어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또 그 이후에는 조선일보에 근무하게 되었다. 방응모가 낳은 아들 방재선이 일곱 살이 되던 시점에서 방응모가 납북되었다. 당시 방재선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방일영, 방우영 형제가 할아버지의 조선일보를 이어받아 운영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이 조선일보의 경영권 분쟁을 촉발한 것이다. 글쎄, 과연 누가 옳은 것인지.. 쉽게 판단이 안 선다. 그냥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조선일보를 방씨 일가 모두가 포기하고 시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면 싶다.^^

방응모에 이어 조선일보를 승계한 방일영은 호방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술도 꽤 잘 마시는 모양이다. 방일영의 회고록을 보면 3748평의 흑석동 대저택에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 자주 놀러 왔다고 한다. 거기서 기생들을 불러놓고 질펀하게 놀았나보다. 그래서 육영수여사가 방일영을 무지 싫어했다고 한다. 자기 남편을 망치는 인간으로 본 것이다.

왜 박정희는 대통령 체면을 벗어던지고 방일영의 집에 가서 신나게 놀았을까?

당시 박정희를 따라다니던 전 MBC 사장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오직 "천하의 주도 방일영"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일영이 세상에서 알아주는 주당이었다는 소리다.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태평로 1가>에 쓴 ‘지극하고 따스하고 멋진 방 형님’이란 제목의 헌사에서 방일영 사장을 가리켜 “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이라고 칭송을 했다. "머리를 얹어준다"는 의미는 다들 아실 것이다.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 또한 술자리에서 박정희와 대면하게 된다.

어쨌든 간에 방일영은 박정희를 비롯해 서정귀, 이후락 등과도 상당히 어울리면서 신나게 놀았던 모양이다. 방우영의 회고록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왼쪽) 부부와
그의 아들 방성훈 조선일보 기자의 97년 모습.
ⓒ 2005 <조선일보와 45년>


“내가 처음 박정희 대통령을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씨(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동창) 등을 데리고 방일영사장과 함께 한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붙잡고 밴드에 맞춰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광란의 도가니가 펼쳐졌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술로써 맺어진 의리가 가장 끈끈하다.

명문가문 이후락 편에서 언급했듯이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 등은 이런 배경으로 이후락 5인방으로 불려졌고, 물론 그 주변에는 방일영이 있었다.

여기에 방일영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SK 창업자 최종건이 빠지면 안된다. 수원지방의 별 볼 일 없는 직물회사였던 선경이 급성장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종건은 죽는 순간까지 조선일보 사외이사였다.

방일영은 박정희대통령을 "대통령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의 삼촌인 방재선의 증언이다.

“대통령 형님, 한잔 쭈∼욱 드십시오.”
“내가 좀 과한 것 같은데….”
“아니, 제가 대통령 형님 술 실력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이런 대화가 바깥에까지 들려서 당시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도 사실 박정희가 방일영에게 붙인 별명이다. 그 속뜻은 요정정치에 데뷔해보니 항상 엄청난 화술과 주량으로 밤 문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방일영이라는 말이다. 박정희는 "이 세상에서 팔자 제일 좋은 사람이 방일영이다."라면서 부러워했다고 한다.

하여간 술과 여자를 매개로 한 이런 요정정치를 통해서 거대한 이권과 권력이 거래되고, 정치와 언론이 비정상적으로 유착하는 정점에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이 있었다.

사주가 대통령과 술자리에서 형님, 아우하는 조선일보는 언론사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가 포함된 유신쿠데타가 일어나자 서슴없이“구국의 영단”( 1 2 월 2 8 일자 사설)이라고 보도하며 언론사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런 방일영이 얼마 전에 죽었는데 조선일보 사이트에 가봤더니 웃음도 안 나왔다. 무슨 임금님이라도 승하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우초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대나 뭐래나...

우초의 정신을 이어받아 질펀한 광란의 술자리를 열라는 건가? 껄껄

민족언론의 명맥을 유지시키며 조선일보를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 언론으로 키워낸 거성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전문으로 올라온 문교부장관을 지낸 권이혁이 쓴 방일영 조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우초 형의 일생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위대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의 일생은 민족 언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선두주자로서 이름 있는 언론인과 문화인을 길러낸 일생이고, 사회 각 분야에서 값진 활약을 하고 있는 인재들을 양성한 일생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람은 이 자리를 슬픔을 뛰어넘어 인간 방일영을 재평가하는 장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비록 형의 몸은 갑니다만 방일영 정신·방일영 인간성은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 그리고 이 땅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니 계속해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밝혀 줘야 하는 의무와 소임을 다하셔야 한다는 부탁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무심코 읽다가 까딱 잘못하면 울지도 모르겠다.

박정희는 방일영이 맡았고, 그 후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자 전두환의 비위를 맞추는 역할은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이 맡았다. 나치정권 선전상이던 괴벨스와 같이 국민 우민화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던 전두환의 심복 허문도를 도와 국보위 입법위원으로 참여하여 희대의 언론통제 악법인 '언론기본법'을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살인마 전두환은 조선일보에 의해 민족의 영웅이며, 구국의 지도자로 둔갑하였다.

광주학살이 끝난 후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떠들었다.

"국군이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리영희선생님의 정리를 끝으로 방씨들의 끝도 없는 비리를 대충 끝내겠다. 손가락만 아프다.

“(역대정권은) 권력의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고, 그들의 범죄를 ‘반공’으로 정당화하며, 그들의 사리사욕을 ‘애국충정’으로 칭송하는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광주에서의 양민 대학살을 ‘국가 안보적 합법행위’로 감싸주고,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인사들의 목을 조르는 온갖 야만적 탄압행위를 ‘빨갱이 잡기’로 정당화해주는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소위 ‘언론사’와 ‘언론인’은 그 요구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 범죄적 권력의 공범자가 된 것이다. 그 대가로 소위 ‘언론사(주)’는 비대화하고 ‘언론인’을 자처하는 기능인들은 그 직장의 안과 밖에서 화려한 승진과 영달의 사다리를 달려 올라갔다. 그렇게 해서 부정한 정치권력과 타락한 언론권력은 일체화되어갔다.”(리영희, <말> 1996.3)



△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이사 ⓒ 엠파스 검색

 

방일영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 아들 방상훈은 조선일보의 대표이사로서 현재 사주다. 숭문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작은 아들 방용훈은 코리아나호텔 대표이사다.

방일영의 장남 방상훈의 부인은 윤순명이다. 윤순명의 아버지가 윤영구다. 그러니까 방상훈의 장인이다. 윤영구의 아버지가 윤영선이다. 윤영선은 그 악명높은 윤치호의 아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방상훈의 부인 윤순명은 그 악명높은 윤치호의 증손녀다. 이런 부분은 조선일보에 전혀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방상훈의 부인 윤순명의 증조부 윤치호의 친일행위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한민국 한복판에 99칸짜리 고택을 지어놓고 명문가문 운운하는 바로 그 집안이다. 윤치호의 사촌형이 중추원 의관을 지낸 친일파 윤치소다. 그 윤치소가 낳은 아들이 바로 윤보선이다.

이 윤씨 명문가문은 앞으로 새로운 장에서 주의깊게 살펴보겠다. 아주 골 때리니까 기대하시라.

방상훈의 장인 윤영구는 교통부 관광국장, 육운국장을 거쳐 메트로 항공사 회장을 지냈다. 그의 동생 윤승구는 윤보선 비서를 지낸 뒤 개인사업을 하다가 요즘은 충남 아산의 윤치호 고택을 지키고 있다.

윤영구의 작은아버지 윤광선은 6.25 때 북한으로 끌려갔다. 물론 아버지 윤치호의 친일행적때문이다. 이 윤광선의 딸 하나가 시집을 잘 갔다. 서울대 약대 학장, 대한 약학회 회장을 지낸 채동규가 윤광선의 사위다.

채동규는 아들들을 많이 두었는데 거의 의사, 교수로 키웠다. 절반은 미국물을 먹고 있고, 절반은 한국에 있다. 한국에 있는 채동규의 가지들 가운데 채영문 연대 보건대 교수, 채기준 이대 전산과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연세대 이사장으로 있는 일민 방우영은 1남 3녀를 두고 있다. 아들 방성훈이 현재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 중이다. 방우영의 아들 방성훈의 장인은 영풍그룹의 주력사인 고려아연의 부회장 최창근이다.

나는 최창근을 전문경영인으로 보고 싶었다. 그런데 뒷조사를 해보니까 신기하게도 영풍그룹의 창업자인 장병희와 고향이 똑같다. 똑같이 황해도 봉산 출신이다. 뭐가 있는게 분명하다. 역시 개천에서 용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껄껄.

각설하고 이 부분에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왜 방우영이 연세대학교 이사장인가? 돈 주고 산 것인가? 무슨 학문적 업적을 남겼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연세대학교 이사장이 된 건가? 거참 희한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의 사연은 연대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본부의 자료를 참조하시길..

어쨌든 이 방우영의 딸 방혜성이 태평양 창업자 서성환의 큰아들 서영배와 결혼하였다.

방우영의 딸이 시집간 이 서씨집안의 혼맥이 화려하다. 서성환의 큰딸 서송숙은 서강대학교 상경대학장 박내희와 결혼하였다. 그렇다면 소위 서강학파의 정점에 있는 건가?

서성환의 둘째 딸 서혜숙은 김의광과 결혼하였다. 김의광은 현재 태평양 계열사의 회장이다. 김의광의 아버지는 만주군 대위 출신으로서 국방부 차관, 상공부장관, 내무부장관, 교통부장관, 한전 사장을 지낸 김일환이다.

김일환은 대한민국에서 군생활을 얼마나 했다고 재향군인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군으로 있다가 한국에서 군생활 5년 남짓하고는, 재향군인회에서 영향력 행사하는 것은 50년 세월이다. 껄껄. 김일환은 경흥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서성환의 세째 딸 서은숙은 고려대 의대 교수 최상룡과 결혼하였다. 최상룡의 아버지는 박정희정권하에서 국회의원, 국회 건설위원장을 지낸 최두고다. 부산 동성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서성환의 네째 딸 서미숙은 부도난 우성그룹 부회장 최승진과 결혼하였다. 서미숙은 리베라 호텔의 고문으로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비록 회사가 망했지만 굶지는 않을 것이다. 나보다는 잘 살겠지.

서성환의 둘째 아들 서경배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농심그룹 신춘호 회장의 딸 신윤경과 결혼하였다. 이로서 조선일보는 막강한 롯데패밀리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역시 조선일보 혼맥의 백미는 방상훈의 장남 방준오와 LG 공동 창업자 허정구의 손녀 허유정이 결혼한 것이다. 지난 번에 언급했듯이 이로써 조선일보는 김동조가문과 결합되면서 방준오는 정몽준의 처조카사위가 된다.

이 GS는 LG와 연결이 되어있고, LG는 한진과 연결이 되고, 한진은 롯데와 연결이 되고, 롯데는 농심과 연결이 되고, 농심은 태평양과, 태평양은 조선일보와 다시 연결이 된다.

뱀발:
조선일보 방응모 편에서 결정적으로 빼먹은 것이 하나 있어서 보충한다. 방우영의 세째 딸 방혜신이 대양산업 회장인 정연욱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정연욱의 아버지가 신한국당, 한나라당 간판으로 울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을 한 그 유명한 정재문이다. 정재문의 부인 박영애의 동생 박애자가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형의 아들 이두용과 결혼하였고, 이 이재형의 동생, 그러니까 이두용의 작은 아버지가 대림그룹을 창업한 이재준이다. 이재준을 계승한 현 대림그룹 회장 이준용의 75년생 세째 며느리 최영윤의 아버지가 삼환기업 회장 최용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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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가문 (제12 편) - 조중훈家



한국의 명문가문은 2005년 9월에 피투성이님이 서프라이즈에 연재한 12편의 대한민국 명문가문들에 대한 글이다.

나의 수구떼 지도에서 부실한 부분이 꽤 많은데 그 가운데 하루 속히 채워넣어야 할 부분이 이 '조중훈가'이다.

그렇다면 왜 하고 많은 기업인들 가운데 하필이면 조중훈이냐??

나는 이상하게 선단식 황제경영, 전제군주식 경영하면 이병철이나 정주영보다 조중훈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조중훈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기업인 가운데 하나다.

이병철, 정주영과는 느낌이 다르다. 이병철, 정주영은 어쨌든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들이다. 또 어쨌든 세계 1등을 해낸 사람들이다. 조중훈은 무엇을 창조했나? 어떤 부분에서 세계 1등을 차지했나?  생산한 게 별로 없다. 이병철, 정주영은 빛이 있고 그림자가 있는 반면, 조중훈은 그림자가 너무나도 짙을 뿐만 아니고 빛을 발견하기가 무지 어렵다.

따라서 조중훈을 기업인 가운데 최고 명문가문으로 가장 먼저 넣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 조중훈 회장 ⓒ 엠파스 검색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훈에 대한 칭송은 차고 넘친다. 우선 "한우물만 파라"는 조중훈의 경영철학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진의 계열사를 보면 대한항공을 비롯해서 한진중공업, 한진종합건설,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한진정보통신, 한일레저, 칼호텔네트워크, 한국글로발로지스틱스시스, 싸이버로지텍, 토파스여행정보, 한진관광, 동양화재해상보험, 메리츠증권 등등이다.

이게 한우물만 파는 건가? 창업회장을 칭송하는 것은 좋다. 부자 조중훈을 떠받드는 것도 좋다. 그러나 사실관계는 분명히 하고 찬양을 해야 할 거 아닌가? 위에 예시해놓은 계열사들이 어떻게 한우물인가?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저거 말고도 부지기수로 많다.

조중훈하면 수송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송은 인체의 혈관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는 조중훈의 말도 맞다. 그러나 수송업의 한우물만 팠다는 말은 말이 안된다. 메리츠증권이 수송업이 아니기 때문에...

또 한가지 조중훈에 대한 근거없는 칭송이 있는데, 나도 어릴 때 조중훈의 전기를 읽고 그렇다고 굳게 믿어왔다. 뭐냐면 조중훈이 무지하게 가난한 정비공 출신이라는 거다. 아니면 무슨 트럭운전사 출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인제도 얼마전에 그 따위 소리를 떠벌리는 것을 내가 들었다. 모르는 소리다. 조중훈이 상당히 나이를 먹은 후 그 부친이 사업에 좀 실패하긴 했어도,  서울 토박이로서 상당한 지주집안 출신이었다.

무슨 맨주먹으로 일어났느니 하는 소리가 다 개떡같은 소리란 말이다. 조중훈이 1920년생인데 1942년에 이연공업사라는 공장을 설립했으니 22살 때 사장이 되었단 말이다. 자기 아버지 도움없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22살짜리가 무슨 재주로 사장이 된 단 말인가? 이게 맨주먹으로 일어선 건가?

광복 이후 조중훈은 화물운송업을 전개했는데 당시 조중훈처럼 화물운송업을 하는 사람은 경인지역에만 50여곳이 있었다.  조중훈이 약진하게 된 배경은 따로 있다. 미군 화물수송을 따내면서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조중훈은 미군의 신뢰를 얻기 위해 당시 부자들이 타고다니던 중고 지프 대신 국내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들었던 벤츠를 타고 다녔다. 또 자신의 자택으로 미군들을 초대해서 풀 코스 요리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엄청 매달렸던 모양이다. 그것도 쥐뿔이라도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심지어 귀국하는 미군간부의 송별식까지 열어주었다. 그러니 당근 미군들이 좋아할 수 밖에. 이것은 훗날 조중훈이 비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조중훈이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던 장성들의 도움으로 주월미군의 화물수송까지 맡은 것이다. 베트남전은 조중훈이 명실상부한 재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안겨주었다. 그러니까 한진은 명실상부한 친미자본이다.

한진이 역사적으로 유별나게 권력과 같은 '힘'에 대해 숭배에 가까운 비정상적 행태를 보여온 이면에는 친미자본으로서의 태생적 한계가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힘있는 자에게 의존해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가는 방식이다. 어찌 미국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미국에게 할 말 하겠다는 현정권이 밉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쨌든 이런 방법으로 한국은행의 가용외화가 5000만 달러도 안되는 시점에서 조중훈은 1억달러가 넘는 돈을 벌었다. 그야말로 떼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그 떼돈으로 조중훈은 동양화재해상보험을 사들이고, 한진건설을 설립하고, 인하대학교까지 베트남 전쟁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불하받았다. 게다가 국영기업이었던 대한항공까지 인수하였다.

조중훈은 전제군주식 독단성으로 유명하다. 총수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는 것이다. 임원들의 의견은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조중훈의 "돌격 앞으로" 명령 앞에 모든 의견들은 묵살되기 일수였다. 조중훈의 주장만이 관철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내 언로가 동맥경화를 일으키고 기업문화가 왜곡되는 것은 당연하다.

조중훈의 아들인 조양호 또한 임직원들에게 매우 호된 것으로 유명하다. 호된 것도 좋지만 호되게 혼내고 나서는 풀어주기도 해야 하는데 대한항공 임직원들에 의하면 전혀 그런 성격은 못된다고 한다. 심지어 차갑기 그지없다는 혹평이 잇따른다.

게다가 조중훈은 인천 짠돌이라고 불릴만큼 사원들에게 월급을 박하게 주는 인물로 유명했다. 출퇴근 버스를 폐지하는 등 사소한 것으로 직원들의 기를 꺾었다. 다른 재벌그룹에 비해 복지혜택이 낮아 사원들의 근무의욕도 물론 낮았다.

또 조중훈의 회사는 육해공군 출신과 민간인 출신의 벽을 만들고, 학연과 지연을 가리는 연고주의가 팽배했다. 상관의 잘못을 보고도 말 한마디 못하는 권위주의가 기승을 부려 사원들의 사기가 완전 저하됐다.

그 결과는 고객 7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회사로 전락한 것이다.

조중훈의 냉혹성은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대한항공을 성장시킨 동생 조중건을 팽시킨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룹 차기회장으로 예견되던 동생 조중건을 내쫓고 장남 조양호를 앉힌 것이다.

동아일보에 의하면 조중훈은 동생 중건에게서 대한항공 사장 자리를 회수한 뒤 장남에게 물려주면서 “하와이에 있는 호텔 하나만이라도 달라”는 동생의 마지막 부탁마저 끝내 거절하고 몰아냈다고 한다.

사주가 이렇듯 유별나게 냉혹한 성품이다 보니 대한항공은 의사소통이 활발하지 못하다고 한다.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바쁘다고 한다. 임원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회장이나 사장에게 소신껏 얘기하는 인사는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오직 상명하달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결국 이런 관료화된 사내분위기로 인해 김대중정부 들어와 큰 코를 다치게 된다.

김대중정부 출범 겨우 2년만에 무려 14건이나 사고를 낸 대한항공은 급기야 대통령이 직접 국무회의에서 “대한항공은 전문경영인이 나서 인명중시 경영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폭탄발언’을 하게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무서운 직격탄을 쏘았다. "대한항공 사고는 오너경영의 실패를 잘 보여주는 케이스다"

김대중 대통령의 언명이 떨어지자 다음날 강봉균 경제수석이 나서서 "경영인 바뀌는 거 정도는 대책도 아니다"라고 겁을 주었다. 드디어 중통령이라고 불리우던 최고실세 박지원 수석까지 "대한항공의 문제는 기업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의 문제"라고 했다.

조중훈은 정권실세들의 기세등등함에 겁을 먹고 대한항공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전문경영인 심이택을 앉혔다.

그러나 늦었다. 국세청 특별세무조사팀 240명이 한진그룹을 접수하였다. 국세청은 한진그룹의 1조 395억원의 탈루소득을 적발하고, 5416억원을 세금으로 추징하였다. 살면서 그렇게 국세청 직원들이 멋있어 보인 적이 없었다. 정치적인 의미가 있건 없건 탈세를 막는 것이 국세청의 할 일이니까 잘 한 거다.

△ 조양호 회장 ⓒ 엠파스 검색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은 직접 외국순방차 대한항공에 탑승한 김대중대통령 앞에 "죄송합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조양호를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입을 굳게 닫았다.

사실 이 사태는 조양호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조양호는 국민의 정부 건설교통부 장관 면전에서 항공국장을 꾸짖을 정도로 권위의식에 젖어있었다고 한다. 옛 교통부를 대한항공 서소문지점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대한항공이 여러번 항공국장을 갈아치웠다고 한다.

이같은 위세는 조중훈이 역대 군사정권에 정치자금을 대 주고, 국적항공사의 대표로서 대우를 받으며, 한편 특별한 역할을 하면서 생긴 것이다. 이런 권력과의 밀착관계 속에서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으면서 안전문제에 관한 노력은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대한항공의 위세를 더 이상 눈뜨고 봐 주기 어렵다는 공식보고서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올라갔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진을 찍어낸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씨 가문은 미봉책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권력핵심부에 접근하려고 무지 노력했다고 한다. 한편 뒤로 완전히 물러난 것으로 알았던 조중훈과 조양호가 대한항공 경영에 관여한다는 보고가 올라가 김대중대통령을 진노하게 만들었다.

"조회장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이라는 대통령의 지적이 있자마자 국세청 요원 240명이 한진그룹 사옥과 김포 대한항공 본사, 여의도 한진해운 등 한진그룹 계열사 5곳을 전광석화같이 접수하였다. 한진 직원들은 부동자세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탈세, 외화도피, 기업자금유용, 변칙증여의 혐의를 잡아냈다. 검찰도 이에 맞춰서 반부패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여 한진을 압박하였다. 한진 창사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물론 이 사태로 조중훈은 너무 고령이었기 때문에 구속이 안됐지만 조양호는 철창행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결과가 빚어진 이유를 김대중 납치사건과 조중훈이 관련이 있다는 점과 조중훈이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열성적으로 지지했다는 점 등을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발상이다.

전근대적인 지배구조를 바탕으로 전제군주와 같이 황제경영을 하면서 독점적 지위에 안주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범법을 일삼은 것에 대한 사필귀정의 응보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73년 김대중납치사건 당시 조중훈의 행적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출입국 기록에 의하면 조중훈은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8월16일부터 9월21일 사이 수 차례에 걸쳐 도쿄를 오간 것으로 확인된다고 한다. 조중훈이 납치무마비 조로 3억엔을 들여 다나카를 매수한 것도 문명자 기자에 의해 밝혀졌다. 이렇게 3억엔을 들여 다나카 매수공작에 성공한 후 조중훈과 대한항공은 승승장구했다. 경쟁사 하나 없는 독점재벌로 족벌 경영의 극을 치닫다가 결국 99년 화를 입은 것이다.

또 조중훈은 92년 대선에서 노골적으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고 공공연히 김대중 후보를 적대시했다는 것도 세간에 알려진 바 대로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유분수지 한진중공업 LNG선 건조에 착수하면서 "나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배를 지을 터이니, 여러분은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켜 달라."고 연설했다.

하여튼 여러가지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밉보여서 장남 조양호가 감옥까지 가는 신세가 됐지만 또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서 얼마 안 있어 특사로 풀려났다. 경제발전에 다시 동참할 기회를 준대나, 뭐래나.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패가망신, 가문이 뿌리째 날아갈 뻔했지만 여전히 조중훈 일가가 막강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공룡처럼 버티고 서 있는 대저택에 폭풍우 한번 지나간 정도에 불과하다.

조중훈의 동생 조중건의 딸 조윤정은 이동원의 아들 이정훈과 결혼하였다. 이동원은 김동조와 한패로서 민주개혁세력의 집중감시를 받는 사람이다. 이동원에게는 이정은이라는 딸이 있다. 1959년생이다. 1959년생이 2002년에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바로 이동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동원학원의 동원대학 학장이다. 이정은의 남편은 한일투자신탁 사장으로 있는 이정진이라는 사람이다.

조중훈의 형 조중렬의 아들 조지호는 이승만정권하에서 내무부 차관을 지내고 박정희정권하에서 상공부 장관을 지낸 이병호의 딸 이숙희와 결혼하였다.

조중훈의 큰 아들 조양호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교통부차관을 지낸 이재철의 딸 이명희와 결혼하였다. 담당 주무부서의 고위관료의 딸과 결혼을 한 것이다.

조중훈의 둘째 아들 조수호는 최은영과 결혼하였다. 최은영의 아버지는 NK그룹 회장 최현열이다. 최현열의 부인은 신정숙이다. 신정숙의 오빠가 그 유명한 롯데그룹 신격호회장이다. 또 다른 오빠는 농심그룹 신춘호회장이다. 또 다른 오빠는 일본 산사스 식품의 신선호회장이다.

△ 신격호 회장 ⓒ 엠파스 검색


그러니까 조중훈의 둘째 아들 조수호의 부인 최은영의 외삼촌이 바로 어마어마한 신격호, 신춘호, 신선호다. 무섭지?  롯데그룹의 후계자로 유력한 신동빈 부회장은 당근빤스 최은영의 사촌오빠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조중훈의 며느리인 최은영의 외삼촌 신선호의 딸 신유나가 태광그룹 창업자인 이임룡의 세째아들 이호진과 결혼하였다. 이 이호진의 매형이 양원용이다. 양원용의 사촌누이인 양경희가 중앙일보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와 결혼을 하였다.

조중훈의 막내 아들 조정호는 LG 창업자 구인회의 아들인 구자학 전 LG 반도체회장의 딸 구명진과 결혼하였다. 이 조정호의 장모인 이숙희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의 딸이다. 그러니까 조중훈의 막내아들 조정호의 부인 구명진의 외삼촌이 삼성그룹 이건희회장이다. 게다가 LG그룹 구본무회장은 조중훈 며느리의 사촌오빠가 된다. 헐!!!!!!!!!!

그런데 졸라 희한하다.

잘 봐라. 조수호와 조정호가 형제다. 그런데 조수호는 처의 사촌형부의 사촌누이의 남편의 형으로 홍석현에게 도달하고, 조정호는 처의 외삼촌의 처남으로 홍석현에게 도달한다.

??????

똑같은 형제인데 조수호와 홍석현은 같은 급이고, 조정호와 홍석현은 조정호가 한수 아래다. 껄껄..

어쨌든 조정호가 요즘 회장으로 있는 메리츠증권에 부회장으로 김한이라는 사람을 임명했다. 김성수편에서 언급했듯이 김한은 삼양 김연수의 둘째 아들 김상협의 아들이다.

한진의 3세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들이 결혼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일 것이다. 어떻게 엮이는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명문가문, 서프라이즈, 신격호, 조양호, 조중훈, 피투성이, 한진




편집 2004.02.03(화) 23:41

재벌-정계-언론 혼인동맹 기득권 재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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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30대 재벌 혼맥도>
  • “책임의식 돌아보는 계기됐으면”

  • 최근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가 ‘30대 재벌 혼맥도’를 발표했다. 이 혼맥도는 재계와 정·관계, 언론계 등 한국사회 지도층의 혼인관계를 통해 우리사회의 ‘기득권 대물림’이 이뤄지는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혼맥도를 토대로 삼성, 엘지, 현대, 롯데 등 4개 재벌그룹과 정계 및 언론계를 중심으로 한국사회 지도층의 혼맥을 자세히 조명해 본다. <편집자>


    [엘지그룹] 거대한 거미줄 재계 혼맥의 핵




    창업주 구인회씨 '통혼을 경영하듯'
    4대 걸쳐 권세.재력가와 전방위 결합

    엘지그룹은 한국 상류사회 혼맥의 핵심으로 불릴 만하다. 삼성, 현대, 에스케이, 효성, 한진, 두산, 대림, 금호, 한일, 벽산 등 국내 굴지의 재벌가문은 물론, 정·관계 및 학계 쪽으로도 거대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방대한 혼맥의 이면에는 ‘통혼을 경영하듯 했다’는 고 구인회 창업주의 독특한 ‘통혼관’이 있다. 재산이 별로 없던 집안의 장남이었던 그는 불과 14살 때 옆집 천석꾼의 딸인 허을수씨(당시 16살)와 결혼하는 ‘모범’을 보였다. 이후 구 회장은 자녀들을 출가시키면서 힘이 닿는 한 당시 최고의 재력가나 권세가, 명문가를 찾아 사돈을 맺었다. 자손이 많은 집안이라는 것도 엘지가 재계 혼맥의 핵으로 떠오른 이유다. 구 회장 형제들의 자손이 4대까지 내려오면서 직계가족만 100여명에 이른다.

    엘지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재벌과의 사돈맺기이다.

    정·관계 쪽으로는 구 회장의 동생 태회·두회씨가 딸을 이계순 전 농림부 장관과 김택수 전 공화당 원내총무 집안으로 출가시킨 것과 김태동 전 보사부 장관의 딸(김영식)을 장남 자경씨의 맏며느리로 맞아들인 것 정도다. 또 구 회장의 동생 철회씨는 장녀 위숙씨를 경남 진양의 대지주 허만정씨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 지방의 큰 재력가였던 허씨 집안은 당시 구씨 가문 못지않게 화려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어,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세 다리,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다섯 다리 건너 사돈지간이 된다.

    구 회장의 3남 자학씨는 1957년 이병철 삼성 회장의 둘째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당시 국내 재계는 삼성과 락희(엘지의 전신)가 양분하던 때였다. 당시 재계 1위였던 현대와는 1996년에야 맺어졌다. 정주영씨의 손자 일선씨와 구태회 엘지전선 명예회장의 손녀 은희씨가 결혼한 것이다.

    삼성가로 장가간 자학씨의 차녀 명진씨는 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회장의 며느리로 들어갔다. 명진씨는 조 회장의 4남 정호(메리츠증권 회장)씨와 결혼했다. 박두병 두산그룹 창업회장의 조카 용훈(두산건설 부회장)씨는 고 구태회 엘지 창업고문의 4녀 선희씨와 결혼했다.

    이밖에 구인회 회장의 동생 고 철회씨의 손녀 문정씨는 고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손자 재영씨와 결혼하는 등 대부분의 자손들이 평범한 집안과 결혼한 사례가 드물만큼 당대 최고의 재력가나 명망가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

    이런 관계는 사업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엘지는 사돈기업인 극동도시가스의 지분을 인수해 도시가스 사업에 진출했다. 반면 사돈지간이라고 해서 모두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 대표적으로 1968년 삼성이 당시 금성사(현 엘지전자)가 독점하다시피 하던 가전시장에 뛰어들자 양가의 관계가 벌어졌고, 현재도 최고의 라이벌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현대그룹과는 ‘반도체 빅딜’로 한때 ‘원수지간’이 되기도 했다. 박효상 기자 hspark@hani.co.kr

    [현대그룹] 3세들 재벌가 혼인 두드러져




    현정은 회장, 전 신한해운 딸.외가는 전방
    김석원씨 아들.엘지창업주 조카 한식구로

    고 정주영 명예회장부터 시작되는 ‘범현대가’의 혼맥은 다른 그룹에 비해 소박한 편이다. 정 명예회장은 정략결혼을 싫어하고 자식들 결혼만큼은 본인들의 의사에 맡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3세로 내려오면서 재벌가와의 혼인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정 명예회장에겐 8남1녀의 자식과, 7명의 동생(남자 6명, 여자 1명)이 있다. 직계 자식 중에 눈에 띄는 결혼을 한 사람은 5남 고 정몽헌 회장과 6남 정몽준(54) 현대중공업 고문 정도다. 다섯째 며느리인 현정은(49) 현대그룹 회장의 아버지는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으로 결혼 당시 신한해운 회장이었다. 어머니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은 김용주 전방(전 전남방직) 창업자의 외동딸로 김창성 경총 회장과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이 남동생들이다. 여섯째 며느리인 김영명(48)씨는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막내딸이다.

    조카들 중에서는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장녀인 숙영(45)씨가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장남 경수(50)씨와 결혼했다. 또 정상영 케이씨씨(금강고려화학) 명예회장의 둘째아들 정몽익(42) 금강고려화학 부사장이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여동생인 신정숙씨의 딸 최은정(41)씨와 결혼했다.

    3세 중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장남 몽필(작고)씨의 둘째딸인 유희(31)씨가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아들인 김지용(31) 용평리조트 상무와 결혼했다. 차남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외동아들 정의선(34) 기아차 부사장은 중견 철강회사였던 강원산업 정도원 부회장의 맏딸 지선씨와 혼인했다. 강원산업은 2000년에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아이앤아이(INI)스틸에 합병됐다. 정몽구 회장의 세 딸은 비교적 평범한 집안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4남 몽우씨의 장남 정일선(34) BNG스틸 부사장은 구인회 엘지그룹 창업주의 조카인 구자엽 희성전선 부회장의 딸 구은희씨와 결혼해 현대가는 엘지가와도 사돈인연을 맺게 됐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롯데그룹] 직계보다 형제자매쪽 '화려'




    롯데그룹- 직계보다 형제자매쪽 '화려'
    신격호회장, 일본재벌가서 며느리 맞아
    동생들 현재.한진.태평양.조양상선과 혼사

    제과와 호텔, 백화점 등을 핵심 사업으로 거느린 롯데그룹도 무시못할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2남1녀를 둔 신격호(82) 회장 직계의 가계도는 비교적 간단해 보이지만, 동생들에 의해 번져나간 재계 혼맥은 매우 두터운 편이다.

    우선 신 회장의 차남 동빈(49)씨는 19년 전 일본의 대형 건설회사인 다이세이건설 부회장의 딸 마나미와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일본 황실의 며느리 물망에까지 올랐던 귀족 집안 출신이고, 당시 결혼도 후쿠다 전 수상이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과사업으로 부를 일으킨 신 회장이 수십년간 일본의 정·관계에 쌓아온 인맥의 결정체인 셈이다. 롯데 부회장인 동빈씨는 현재 롯데닷컴과 코리아세븐의 대표이사도 맡고 있다.

    재미교포 조은주씨와 결혼한 장남 동주(50)씨는 제과와 식음료 사업이 주력인 일본 롯데를 경영하고 있고, 장녀 영자(62)씨는 롯데쇼핑 부사장을 맡고 있다.

    신 회장의 둘째 동생인 신춘호(72) 농심그룹 회장은 모두 5명의 자녀를 뒀는데, 태평양과 조양상선 등 재계 일가와 혼인시키면서 연이어 사돈으로 연결된다. 차남 동륜(45)씨는 김진만 전 국회부의장의 셋째 딸인 희선(44)씨와, 차녀 윤경(36)씨는 서경배(41) 태평양 사장과 각각 결혼했다.

    신 회장의 셋째 여동생인 경숙씨의 장남 기택(46)씨는 정일영 전 국회의원의 장녀 형은(43)씨와 결혼했다.

    롯데는 또 신 회장의 넷째 여동생인 정숙씨를 통해 현대와 한진그룹과도 사돈 관계를 맺었다. 장녀 최은영(39)씨는 한진해운 창업주 조중훈 명예회장의 3남 수호(50)씨와 결혼했다. 수호씨는 지난해 한진해운 회장직에 올랐다. 차녀 최은정씨의 남편 정몽익(42)씨는 정상영 케이씨씨(금강고려화학)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부사장이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형제간에 사업 교류가 전혀 없고, 신 회장 직계로 보면 정계와도 연결이 안돼 있는데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게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홍대선 기자 hongds@hani.co.kr

    [삼성그룹] 언론계와 2대에 걸쳐 사돈




    이건희 회장 큰딸 회사원과 결혼 이례적
    이병철씨 자녀 9명중 5명 정.재계쪽

    재계 1위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일가의 혼맥은 재벌가로부터 언론사주와 평범한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고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이 회장 본인은 법무·내무장관을 지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작고)의 장녀인 홍나희씨와 결혼했다. 이 회장은 1남3녀를 두었는데, 막내 딸을 빼고는 모든 결혼했다. 장남인 이재용(36) 삼성전자 상무는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딸인 세령씨와 결혼했다. 둘째 딸인 이서현(31) 제일모직 부장은 동아일보 사주인 김병관 회장의 차남인 재열씨와 결혼했다. 재열씨는 올초 제일모직 상무로 초고속 승진했다. 이 회장은 일반적으로 언론사주와 직접 통혼하는 것을 꺼리는 다른 재벌가와는 달리, 2대에 걸쳐 사돈관계를 맺었다. 반면 장녀인 이부진(34) 호텔신라 상무보는 에스원의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임우재씨와 결혼해 화제가 됐다.

    이 회장의 부친인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모두 4남6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거미줄같이 얽히고 설킨 재계와 정·관계 사이의 혼맥을 통해 국내 거의 모든 재벌 및 권문세가와 관계를 맺었다. 장녀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영남지방 대지주의 아들인 조운해 전 고려병원 이사장과 결혼했다. 네째딸 덕희씨의 남편인 이종기 전 삼성화재 부회장도 대지주 집안 출신이다. 장남인 맹희씨는 손영기 전 경기도지사의 딸인 손복남씨와 결혼했다. 다섯째 딸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남편인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은 4·5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상희씨의 아들이다.

    같은 재벌가와 결혼한 것은 차녀인 이숙희씨이다. 숙희씨의 남편은 구인회 엘지그룹 창업주의 세째 아들인 구자학 아워홈 회장이다. 이병철 회장과 구인회 회장은 보통학교를 함께 다닌 죽마고우이다. 하지만 삼성이 68년 엘지(당시 럭키금성)가 독점해온 전자부문에 뛰어들면서 숙희씨 부부는 어려운 처지에 빠지기도 했다. 차남인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과 네째 아들 태휘씨, 여섯째 딸 혜자씨는 모두 일본인과 결혼했다. 세째 딸인 순희씨는 대학교수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삼성그룹은 “과거에는 결혼을 통한 정경유착 사례가 있었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며 재벌혼맥에 대한 세간의 관심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정치권] 노태우씨 SK.신동방과 사돈

    박정희씨 풍산.벽산, 전두환씨 대한제분과
    노신영 전총리.김동조 전외무 현대등과 '가약'

    정치권 인사들도 위로는 대통령에서부터 국무총리, 장·차관까지 재벌들과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둘째딸 근영씨를 풍산그룹 류찬우 창업주의 장남 류청씨에게 시집보냈다. 이 둘은 나중에 헤어졌다. 벽산그룹과도 사돈관계인데, 박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씨의 딸 설자(59)씨가 박 전 대통령 집권 당시인 1972년 벽산그룹 창업주의 둘째아들 김희용(62) 동양물산 회장과 결혼했다. 박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딸 예리(53)씨를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의 차남 이동보(55) 코오롱TNS 회장과 결혼시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3남 전재만씨는 한국제분 이희상 회장의 장녀 이윤혜씨와 결혼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에스케이그룹은 대표적인 정치권과 재벌의 혼맥으로 꼽힌다. 노 전 대통령의 장녀 소영(43)씨가 최종현(작고) 에스케이그룹 회장의 장남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44)과 결혼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노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도 신명수 전 동방유량(신동방으로 바뀜) 회장의 장녀 정화씨와 결혼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효성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의 차남인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차남 조현범 한국타이어 상무(32)가 셋째 사위(3녀 이수연씨의 남편)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는 3명의 자식을 재벌가와 혼인시켜 눈길을 끈다. 장남 경수씨는 현대가 정세영 회장의 큰 딸과, 차남 철수씨는 삼성가의 사돈인 홍진기가의 차녀와, 차녀 혜경씨는 류진 ㈜풍산 회장과 결혼했다.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도 3녀 영자씨를 엘지가문의 허광수(58) 삼양인터내셔널 회장과, 4녀 영명씨는 정몽준 현대중공업 고문과 결혼시켜 엘지, 현대와 모두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언론계] 조.중.동, 삼성과 핏줄나누기

    동아, 이건희회장 둘째딸 며느리삼아
    조선쪽 롯데.효성.이명박 시장과 사돈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거대 신문사들의 재계 혼맥은 삼성그룹과 직·간접적으로 닿아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우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중앙일보 홍진기 전 회장의 장녀인 나희씨와 결혼했다. 홍 전 회장의 차녀 나영씨가 노신영 전 국무총리 차남 노철수씨와 혼사를 맺으면서 연결된 중앙일보 혼맥은 노 전 총리로부터 현대 정주영 전 명예회장, 김동조 전 외무장관,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까지 연결된다. 허 회장의 장녀 유정씨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장남인 준오씨와 백년가약을 맺어, 중앙일보에서 삼성을 거친 혼맥이 조선일보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건희 회장의 차녀가 동아일보 김병관 명예회장의 차남과 혼인을 한 것까지 포함하면, 삼성과 3개 신문사의 혼맥도가 완성된다.

    참여연대쪽은 전체 혼맥도를 보는 3번째 관점의 핵으로 조선일보를 제시하기도 한다. 조선일보 역시 태평양, 롯데를 거쳐 조양상선, 김치열 전 내무부 차관, 대전 피혁, 효성그룹을 거쳐 이명박 현 서울시장의 자제에게 연결되어 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경제프리즘> 재벌간 혼맥구조는 기득권 재생산의 통로

    백영현 (참여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2004-02-16

    최근 (사)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사회 지도층 혼맥도’를 작성,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연구작업에 참여했던 백영현 연구위원이 월간 '참여사회' 2월호에 기고한 글을 싣는다. 편집자 주

    아주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돈과 권력은 모든 사회의 최고의 가치였던 것 같다. 논어 리인(里仁)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부와 귀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바이지만, 정도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머물지 말지니라.” 참 멋스러운 말이다. 군자의 용모가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부의 무한축적이 하나의 구조처럼 자리잡은 자본주의 시대에 이런 경구는 왠지 지나치게 도덕적이어서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근자에 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육성사업 일환으로 ‘한국의 재벌’을 연구하는 (사)참여사회연구소 재벌연구팀은 인하대 산업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재벌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52개 재벌가의 친인척과 3000여 명의 정관계 지도층’을 대상으로 ‘한국사회 지도층의 혼맥도’를 조사했다. 대중매체를 통해 발표한 이 ‘재벌의 혼맥도’가 제법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어느 나라든 상류계층간의 통혼은 일상적인 문화현상의 하나인데 그것이 무슨 중요한 성과라고 호들갑을 떠느냐는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사생활침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또 표면적인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이면에 은폐된 전통적 계급사회의 구조를 밝혀주는 쾌거라고 칭찬을 마지않는 사람도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거의 모든 매체에서 제법 중요하게 다루고있지만 유독 조선.중앙.동아일보만은 함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대표적인 혼맥도에 그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기 때문이니 이해할 수 있겠다.

    재벌연구팀에게 혼맥연구는 실질적으로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상이한 두 반응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연구팀의 주된 관심사도 아니다. 다만 수많은 연구주제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주제일 뿐이다. 혼맥도를 공개한 시점도 연구진행계획상 사전에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혼맥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방송매체가 기획하고 있던 신년 프로와 맞아떨어졌을 뿐,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님을 밝혀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구축해 온 인적 네트워크

    이제 사설은 접어두고, 혼맥연구의 목표에 대한 간략한 언급을 시작해보자. 재벌연구팀의 연구목적은 한국재벌에 대한 수량화된 기초자료 수집을 제1목표로 하고 있다. 탄탄한 기초자료가 확보된 위에서 분석이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재생산될 수도, 축적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개별 연구자는 많아도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를 체계적으로 모으는 데는 모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연구팀은 수량화된 자료를 최대한 정리하면서도, 수량화되지 않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들에 대한 정리도 불가피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즉, 재벌들이 역사적으로 구축해온 인적 네트워크가 그것이다. 그리고 재벌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혼맥연구다.

    혼맥연구는 재벌.정계.관계.언론계의 사슬에서 가장 분명한 하나의 요소이다. 그 사슬은 매우 복잡할 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고, 확인 불가능한 정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혼맥으로 연결된 고리만큼은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부와 권력의 복잡한 망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물증이 없는 자료들도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자료들은 너무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십거리는 될 수 있어도 연구대상이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과거 정경유착이 한국경제의 큰 틀을 좌지우지하던 시기, 혼맥이 가지는 의미는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각종 주요 산업에 대한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밝혀진 선정 주체와 대상 사업자, 그리고 그 이면에 깔린 혼맥관계는 과거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재벌들의 성장과정, 사업확장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끝으로 오늘날 포괄적 의미에서의 권력계층이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오해가 제법 팽배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도 흥미롭다.

    시대 흐름에 따른 정략결혼의 추이

    지금까지 진행된 혼맥연구의 내용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혼맥의 특징에 대한 시기구분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분석결과 1960~1970년대에는 재계와 정계사이의 정략 결혼이 대세였으나 세대를 거칠수록 재벌끼리의 결혼이 늘어났고 특히 IMF 이후는 재벌 3세대간의 혼사가 증가하는 추세로 특히 9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변화가 뚜렷하게 포착된다.

    또 연령별 혼인 상대는 20~30대는 정.관계 16%, 재계 60%, 40대는 정.관계 14%, 재계 37%, 50대는 정.관계 23%, 재계 29%, 60대는 정.관계 13%, 재계 26% 등으로 나타났다.

    재벌가의 일원이 소위 지도층 아닌 사람과 결혼한 비율은 20~30대 13%, 40대 27%, 50대 33% 등으로 재벌가 일원과 보통사람과의 혼사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이러한 변화의 의미는 우선 한국사회에서 경제영역의 독자성이 문민정부 이후로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물론 최근 대선불법자금의 천문학적 규모를 볼 때, 과거의 관행이 존속되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 불확실성을 감안해야겠지만, 90년대 재벌과 정.관계의 혼사는 적극적 의미보다는 소극적 의미가 더 크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즉, 혼맥관계를 통해 적극적으로 지대를 추구한다기보다는 방어적 함의가 더 크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사회의 포괄적 의미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들간의 통혼이라는 좀더 보편적인 형태가 강화되고 있다.

    한국 재벌 지배력의 힘은 탄탄한 인맥구조

    다음으로, 포괄적 의미에서의 권력층간의 통혼이 일반화되면서, 한국사회에서 일종의 지배계층이 나름대로 고착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흔히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동성이 한국사회의 빠른 성장의 원동력이고 한다. 역동성 개념은 다의적이지만, 계층간 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지배계층의 고착화 현상은 한국사회의 역동성을 둔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IMF 이후의 계층간 소득불균형 심화는 한국사회의 통합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전망이 어느 정도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면, 기업지배구조개선문제는 단순한 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경제 전체적인 활력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들만의 혼인’이라는 다소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문구가 일반인들의 분노를 자아낼 수도 있지만, 이제 그것은 엄연히 하나의 사회문화현상으로 일상화되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 마샬(A. Marshall)은 오래 전에 기업의 생명력이 경영세습을 타파하고, 끊임없이 유능한 피고용자를 전문경영인으로 흡수하는데서 나온다고 설파했다. “한 세대가 완전히 지났을 때, 과거의 전통이 더 이상 안전한 지침이 아닐 때, 그리고 과거의 직원들을 단결시켰던 결속이 해체되었을 때, 그 사이에 회사의 파트너로 등장한 새로운 사람들에게 사업 경영이 실질적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사업은 거의 필연적으로 박살이 날 것이다.” 이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끝으로, 혼맥연구 과정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한국의 3대 중앙일간지들이 모두 핵심재벌과 그리고 정계, 관계와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간단한 예로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의 차녀와 결혼한 것에서부터 노신영 전 국무총리, 현대그룹,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 LG그룹을 거쳐 결국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장남에게로 연결되는 구조이다. 또한 이한동 전 국무총리와 동아일보와도 혼사로 연결되어 결국 삼성을 중심으로 ‘조-중-동’ 주요언론3사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르게 조선일보도 태평양, 롯데(농심), 조양상선, 김치열 전 내무부 차관, 대전 피혁, 효성그룹을 거쳐 이명박 현 서울시장의 자녀에게 연결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아주 놀랄만한 것이다. 재벌이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인 정계, 관계, 언론계를 전략적인 혼인관계로 연결하고, 그것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면, 오늘날 한국재벌의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독보적 특이성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 인터넷참여연대






















































    <한국의 30대 재벌 혼맥도>

    http://img.hani.co.kr/section-kisa/TOPIMAGE/brid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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